마왕 14부- 눈물을 잃어버린자의 눈물
오승하..
아니 정태성...
그는 울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한번도 양껏 우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형의 주검 앞에서도 그는 울지 않았다.
어머니의 주검을 움켜쥐고도
그는 울지 않았다.
친구 승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그는 울지 않았다.
적어도
소리내서 통곡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세상을 노려볼 뿐이었고,
주먹을 움켜쥐었을 뿐
데굴데굴 구르며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울지 않았다.
그가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울었을 때가 딱 두 번 있다.
첫번째는
승희 앞에서였다.
승하가 바라보는 세계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
그의 세계는 일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살고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그가 살고 있는, 아니 일단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어떤 목적을 위햐어 잠시 빌린,
그래서 특별한 이데올로기 외엔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완고하고 왜곡된 세계이다.
거기엔 그 무엇도 비집고 들어올 수 없고,
설사 해인을 사랑할 지언정
그 사랑조차
그 세계 주변을 맴돌고 겉돌다 말 수 밖에 없는
그런 세계이다.
그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머리 숙일 필요가 없다.
그의 세계에서 그는 정당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를 비난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그토록 고요하고 자신만만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가장 떳떳할 수 없는 상대이자,
그보다 우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승희이다.
왜냐면 그녀는 바로 그가 빌린 껍질인 오승하의 누나이며,
승하의 눈으로 볼 때
죄에 물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지옥문 앞에 서 있지 않은
순결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빛의 향기를 뿜어내는 해인과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승희,
이 두 사람만이
그가 움추러들 수밖에 없는,
혹은 경멸하거나 그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 유일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해인은 사랑하고,
승희는 연민으로 대한다.
그 승희의 입에서
태성아..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갑자기 드러날 때
그는 비로소 12년 동안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보인다.
그가 눈물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오승하 남매에 대한 연민?
혹은 죄책감 때문일까?
그는 메말랐고 인간다운 감각이 마비되어 있고
뒤틀려 있지만,
저 깊은 의식의 심층 속엔
맑은 우물이 있다.
승희가 그에게 들려주는 말들은
그로 하여금 순결한 승희를 통해서,
실은 자기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릇된 자신의 삶을 보게 될 수밖에 없고,
그것들은
그 깊고 맑은 우물에
파장을 일으킨다.
죽음처럼 고요한 그 깊고 어두운 심연 속의
맑은 우물에 살짝 일어난 파장이
그를 울컥하게 한다.
하지만 그는 울컥하고 싶지 않다.
그는 흔들리고 싶지 않다.
그는 그 무엇에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그는
해인에게 말한대로
누가 뭐래도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고 싶다.
그러지 않고는
그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뭘 들이마셔도
그의 갈증은 해갈되지 않는다.
그리고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바로
그 갈증이 해갈되면서
12년을 억눌렀던
소년의 감성이 폭발하는 오수와의 마지막 장면이다.
전에도 썼지만,
그래서
난 오수의
태성아...가 아프다.
해인의 '정태성씨'
승희의 '태성아'
사무장의 '정태성이라는 소년'
등등
이미 그들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그의 참모습을 끄집어내려 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불러주는 것만으론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허덕이는
피곤한 영혼이 정태성이다.
사랑도 이해도 연민도
그 갈증을 채워줄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을 그렇게 만든 오수의
태성아~!
는
비로소
그를 울부짖게 만든다.
그것은 12년을 참아온
설움과 분노와 원망과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삶과 청춘에 대한
회한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과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세상과,
무엇보다
그런 선택을 했던 자신에 대한 미칠 것 같은
후회와 자괴감이
한꺼번에 화산처럼 폭발하는 순간이다.
난 그때
어쩌면
그 소년은 희대의 카타르시스를 맛보지 않았을까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한번도
자기 감정을 제대로 발산해보지 못하고
누르고 또 누르며
12년을 살아온
정태성이
맘껏 포효하고
발을 구르고
주먹질을 하고
가슴을 치며
알몸으로 딩굴었던 그 짧은 순간에
그는 카타르시스를 맛보지 않았을까?
아니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견딜 수 있으니까.
정태성의 눈에서 더이상 흐르지 않는 눈물이
이제 내 눈에서 흐르는 것은 싫다.
그래서
난 간절하게 바란다.
제발,
정태성이
용서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한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미쳐버림으로써
쌓이고쌓인
그 체증을 내려보냈기를...
숨을 거둘 땐
그의 가슴이 텅 비어졌기를..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