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23부- 소파씬으로 현혹하다
소파씬이 처음 방영되었을 때,
게시판에선 다들 둘 사이에 섬씽 스페셜한 일이
벌어졌으리라는 상상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서 아주 게시판이 불붙을 지경이었던 것 같다.
하기야, 그런 상상을 유도하는 게
연출의 의도였다는 게
나의 굳은 신념이다.
하지만
내가 궁을 대하는 시청자들의 대체적인 반응에서 느낀 것은,
무대가 궁이고
주요 인물들이 황족이며
주인공은 미성년의 황태자부부라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시청자가 유부녀들이라 그런가?
마치 결혼 생활 십년 이상 해온,
아니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몇 년은 하고,
애도 한 둘은 낳은,
일반 부부를 대하는 마인드로
두 사람을 바라 본다.
(뭐..그런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드라마를 볼 땐
그 배경과
주인공들의 성격과 처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절대로 잊어선 안된다.
특히 궁 같은 드라마가 그러하다.
물론,
조선시대와는 다른
21세기의 황실이고,
그들은 21세기 청소년의 마인드가 충만한,
그러나 황족들이다.
극 중 내내
우리는 귀가 아플 정도로
황실의 법도에 대해서,
그 엄격함에 대해서
듣는다.
또한 스스로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할지언정
스스로 황태자로 있는 동안엔
엉망진창인 황태자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신군이다.
그건 다시 말해서
자신이 황태자로 있는 동안엔
그 법도라는 것을 지키겠다는 뜻이 포함된,
어쩔 수 없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신군이라는 인물의 정신구조가
분명하게 두드러지는 선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보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말도 안되는 엄한 상상을 하곤 한다.
아니면 그러기를 열망한 나머지
뻔히 알면서도 괜히 그래보는걸까?
가채머리를 이고
정복을 입고
눈은 살포시 내려뜬 채
다소곳하게 보료 위에 앉아 있지 않은
황태자비나
그녀의 남편은
시청자들에게
그들이 지금 어떤 무대 위에서,
어떤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살고 있는지
잊어버리게 하는 모양이다.
궁을 떠나겠다고
난리를 부리던 태자비는
한순간 제정신을 되찾고
너무나 쉽게
모든 걸 뉘우치고 깨닫고 각성하고 자각한다.
놀라울 정도이다.
그동안 내가 입에 거품을 품었던 것이 창피할 정도였다.
이래저래 내겐 미운털이 박힐 짓만 하는 채경이다.
하여튼 그리하여 기나긴 시간을
공연히 서로 할퀴면서
보는 사람들 스트레스받게 하던
황태자부부는 드디어
열렬한 방법으로 화해를 하는데,
사실 그들이 나눈 열렬한 키쓰신은
다음 장면을 상상케하기에 족할 지경이긴하다.
그러나.
난 그 키쓰신에서의 감정 분출을
단순한 욕정으로 볼 수가 없었으니,
그들이 혼인을 하고,
차츰 서로를 원하게 되었음에도
공연히 주변만 뱅뱅 돌며
서로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수많은 상채기를 내며 받았던 갖가지 서러운 기억을
그렇게 분출하는 걸로 봤다.
갖가지 말도 안되는 갈등과 고통의 시간들이
마치 그 키쓰신을 위해 존재했었던 듯..
다음 장면이
곧바로 소파씬이다.
알프레도는 눈을 가리고 있고,
신군은 소파 위에 누워 있으며,
채경은 그 신군의 가슴팍 위에
자신의 상체를 포갠 상태이다.
카메라는 미동도 하지 않고
짓궃다시피하게
그 구도를 고수한다.
무슨 의도로 그러는건지,
대체 무슨 상상을 하라는 건지,
그러나
그 상상이
그동안의 신군이라는 인물에 과연 합당한건지.
황태자부부라는 독특한 신분과 들어맞는건지
계산을 하고 그런 장난을 친 건지 궁금하다.
하여튼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소파 등으로 가려진,
그래서
다소는 미묘하다고 할 수도 있는
그들의 그 자세일 뿐이다.
그들은 그 자세 그대로 줄곧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고,
오랜만에 장난질도 좀 하고
그러면서
그 장면을 끌고 간다.
그게 전부이다.
근데
그 장면만큼은 내게
그 어떤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는
유일한 장면이다.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적어도 다른 궁팬들이 그 장면에서
화들짝 놀란 만큼은 아니었다.
신군의 말대로
굉장히 평화롭고 정적인 장면이라
실망했을 정도였다.
우리 한번 상상해보자.
시간은 밤이었던 듯 하다.
깊은 밤이었는지 초저녁인지 시간은 확실치 않다.
어떻든
화해한 후에
채경은 갑자기 신군이 몸이 좋지 않다는 사실,
말하자면 조금 전에 토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고
더불어 자기가 신군의 아내라는 사실까지 상기한다.
그래서 호들갑스럽게 그의 상의를 벗기고
소파에 눕힌다.
(여기까진 그냥 상상의 영역이다)
사이가 좋아진 그들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채경은 그의 가슴에 자신의 상체를 포개고 있다.
두 사람의 옷차림은 아주 단정하고
신군의 방은 거의 오픈되어 있다.
커튼을 쳐도 침대가 보일 정도로...
상궁나인에 내관들이 완전히 물러가기 전까지는
언제 밖에서 오락가락할지 모를
그다지 은밀하지 않은 장소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대체 무슨 일을 두 사람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상궁나인내관등이 모두 물러간
깊은 밤이었다고 쳐도,
둘이 무슨
거리에서 만난
자유분방한 10대 청소년인가?
자기 욕망이 내키는대로
맘껏 그 욕망을 내지를 수 있는 신분인가?
아무리 21세기의 황태자부부라 할지라도,
평소 신군을 보면 그 마인드는
보수적이기기가
16세기 조선시대 세자 뺨친다.
자유에 대한 갈구와는 별개로
그게 평소
황태자라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신군의 절도이다.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몇번이나 채경과
합방을 하지만
단 한번도
그녀에게 손대지 않는다.
윗전에서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으면
합방도 맘껏 하지 못하는 신분의 두 사람이다.
만일 합방을 하게 된다면
정식으로
관례를 올리고
두 사람의 침실이 정식으로 마련되어야
아마 가능할 것이다.
황제부부처럼
한 침대를 쓰는 게 가능한 사람들이란 말이다.
뭐 윗전보단 그래도 포스트모던한
21세기의 청소년들이니만큼
타이틀이 엄연한 부부이고,
이미 한번인가 윗전에서 공식적으로 합방까지 주선해준 마당에
맘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지만,
적어도 그런 시간, 그런 장소에서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하긴
그런 상상을 하게끔 유도한
카메라와 연출이 문제였다지만.
솔직히
그들의 속셈 또한 어쩐지 너무 얄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 없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질나게 하는
성적인 코드를 고수하는 얄팍함.
그것은 마지막 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슬쩍 약을 올린 후에
꿈깨라는 조소로 보인다.
시종일관 그들의 윗몸만 보여주어
대체 저들은 가려진 부분에선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걸까?
궁금하게
(난 하나도 안궁금했지만)
만들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채경이가 벌떡 일어나면서
별 것도 아니었음을 까발기는 수법이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어김없이
조소어린 그들의 묘수에 말려드는 것이다.
보다시피
소파는 뒷부분에 가서 각을 이루고 있다.
대개 저런 소파는 각을 이루는 부분에서 공간이 꽤 넓다.
벌떡 일어나는 채경의 자세나,
뒤이어 일어나는 신군의 그것으로 보아
신군은 소파 위에 누워 있고,
채경은 그가 눕고 남은 공간에 앉은 자세,
혹은 나란히 누워 있는 자세로
상체만 신군에게
기댄 자세임이
너무나 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