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5부 -사랑은 관심을 타고 (2)
그럼 무존재에 무생물이나 별로 다를 바 없었던
채경이 차츰 신군의 관심을 끌어가는 과정을 보자.
신군은
나이에 비해 노성한 아이이다.
반면에 채경은 나이에 비해서
좀 어리다.
두 사람 사이의 커다란 갭을 메워가는 것이
주어진 과제인데,
신군을 번번히 자극하는 것이 그녀의 솔직함이다.
신군의 주변엔 그렇게 원색적이고 솔직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에겐 신선한 충격을 준다.
무의식적으로 관심이 깔리는 배경은
첫날밤에 손을 물린 사건이다.
채경은 황태자비로 어쨌든 그의 아내가 된 인물이다.
그런데 그 남편이란 사람이
첫날밤에 친구로는 상대해줄 용의가 있다는 말에
손을 물어뜯긴다.
처음,
서로 부딪히면서 신군의 실내화를 더럽힌 채경은
그 다음 두번째로 물어뜯는 걸로 좀더 강렬하고 뚜렷한 흔적을
그에게 남긴다.
실내화라는 외형적인 세계에서
이제 손이라는 육체적인 영역까지 진출하면서
채경은 거듭
그에게 데미지를 입히는 것이다.
물론 그 데미지는 그의 세계로 한 발자욱씩
걸어들어가는 일이다.
신군의 성벽은 매우 견고하기에
데미지를 입히지 않고는 허물수가 없는데,
그런 점에서
겉보기와 달리
두 사람 사이에서 약자는 오히려 신군이다.
신군의 입장에서보면
자기에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부터가
일단 그에겐 신선한 충격이다.
손을 물어뜯긴 사건에 대해서
그날 밤 소란을 부린 것만큼 실제론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다는 것이
골드 3인방에게 첫날밤에 대해서 말할 때 드러난다.
내심 신군은 그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의 무의식에 일단 채경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을 자리잡게 하지만
아직 인식의 단계는 아니다.
두번째로
청춘의 덫 사건이다.
효린의 전화를 받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채경의 눈치를 본 것이
스스로도 화가 나서
특유의 냉소적인
야유를 퍼붓는다.
그때,
신군은 채경이 혼인의 댓가로 요구한 거래에 대해서
언급한다.
역시 그에겐, 누군가가 자신과 인연을 맺는 댓가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상처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겟지만,
그를 보다 냉소적으로 만드는 계기는 된다.
자기 자신을 원하여 혼인하는 게 아니라,
황태자비가 되는 조건으로 거래를 하는 아이..
겉보기엔 순수하게 (그는 그걸 푼수라고 표현하지만 채경이 순수한 아이라는 건 신군도 알 것이다)
보였던 아이가 뜻밖에도 그런 당돌한 요구를 하며 자신과 인연을 맺었다는 것이
잠재적으론 신군에겐 기분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채경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가난한 자신의 친정에 대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아마 신군은 여자가 우는 걸 첨 봤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때 채경의 말에서
신군은 채경에게 자신의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되고,
그것은 경이롭다.
가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는
가난한 친정을 위해 자신과의 혼인을 감행했던
채경의 나름의 고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건 그저 약삭빠른 거래가 아니라,
그녀의 자기 희생적인 결단이었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물이 그에겐 또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남자들은 대개 여자가 눈물흘리며 우는 것에
무지 약하다.
아니, 질색하는 남자도 있다.
특히 신군처럼 겉보기와 달리
마음 약한 타입이면
그 효과는 굉장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니가 싫다는 말을 면전에서 듣는다.
그런 말도 신군은 아마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채경은
'너만 내가 싫은 거 아냐~!
나도 니가 싫어~
넌 싸가지 없고 재수없는 인간이야~!'
라고 선언한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반응의 묵직함에
무턱 가볍고 경박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던 채경에 다시금 놀란다.
여기까지가 무의식 중에 그 존재를 인식하는 잠재적 관심의 단계라면,
2차적으로
상대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그가 씨디를 듣고 있다고 믿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이다.
효린과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살짝 털어놓는 채경의 말은
그를 당황케하고 그 자리를 피하게 만든다.
고백 아닌 그 고백 속에는
신군의 행복해보이지 않는 모습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 이유를 효린과의 이별에 두고 있는 미안함,
그러나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른 여자에게 주는 건 싫다는 천진하고 순수한 이기심이 들어 있다.
그걸 사랑의 고백이라고까지 할 순 없다.
강현의 말은 살짝 오바라고 치고,
어떻든 채경은 신군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신군은 자신이 줄곧 무시하고 상대도 안해준 채경이
뜻밖에도 자신과의 인연을 존중하고 있으며, 거기에 덧붙여서
호감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채경이가 자신에 대하여 내비치는 그 소유욕 또한
그에겐 놀랍다.
그에겐 낯설고 잘 이해가 안가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효린도 자신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외로운 신군에게
그리고 모든 인간 관계에 대해서 냉소적인 그에게
다름 아닌 채경의 천진한 심리는 신선한 충격인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그의 관심을 끌게하고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가장 큰 모티브가
그녀의 솔직함이라는 걸 알 수가 있다.
그건 솔직하지 못하고,
솔직할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그에게
서민적인 세계,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서민의 세계에서도
유독 투명한 채경의 영혼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서민적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이어서 생일 파티에서의 정성이 깃들인,
말하자면 시간과 공이 들어가는 선물
그리고 의외로 재치 있고 재능까지 엿보이는
채경의 선물이다.
(아마 그런 선물도 신군은 처음 받아보았을 것이다.
대개는 돈으로 해결되는 값비싼 선물들이었을테니)
그 신발의 의미를 아는 건 신군 뿐이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채경과 신군을 맺어주는 유일한 매개체라고 해도 좋다.
그는 그때 자신이 차내버린 운동화를
채경이가 버리지 않고,
아니 버리긴 커녕,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감동이다.
그때
자기완 동떨어진 세계,
즉 물이라는 걸로 상징되는 자유로운 세계가
그의 잠자는 일탈의 욕구를 건드린다.
물속에서 물장난을 치는 채경과 그 일파의 모습을
바라보는 신군에겐 동경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물이란
자유를 연상케한다.
처가 나들이에서도
동생과 물싸움을 벌이는 채경을 유심히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물은 절대로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는,
아니 가기 싫어도 떠밀려서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것이 물이다.
그래서 자유를 상징하는 듯한 것이 물이고,
거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녀는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공기의 답답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일탈의 욕구가 슬슬 머리를 쳐드는 것이
바로 채경이가 준 신을 신는 것으로 표현된다.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특히 채경이처럼 그가 보기에 너무나 가벼운 아이가
만들어준 그 신발을 슬며시 신어보는 것은
그 신발을 만들어준
채경이란 인물의 자유롭고 가볍고 바람같은 세상으로
첫발을 디디는 그의 의식을 느끼게 한다.
세번째로,
그녀의 궁안에서의 행동들이다.
그녀에게 황태자비다운 행동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다름 아닌
같은 황족인 율을 상대로
여전히 궁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는 그녀에게
가벼운 질투와 못마땅함을 느끼면서
상대적으로
채경의 존재를 더욱 깊게 인식한다.
채경이 어울리는 사람이 다름아닌 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율은 그녀의 정식 정혼자였던 인물이니까.
황태자자리도 채경이란 존재도
결국은 율이 것이었으니까.
동궁전에서의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방해자가 된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것은
마치 채경이
신군과 효린의 사이를 방해해서 갈라놓았다는 생각에 울적해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채경과 다른 것은,
그는
그래도 현재 동궁전의 주인은 자신이며,
채경은 자신에게 속해 있는 자신의 아내이며,
황태자비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가던 무의식적인 그녀에 대한 관심은
그녀의 존재를 먼저 인정하게 만든다.
관심을 가지려면
상대가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새 채경이 더이상 무존재에 무생물이 아니다.
그 증거로 그는 계란 투척사건 이후에
그녀를 찾는다.
그녀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증거이다.
늘 혼자였고, 혼자 있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그가,
울적할 때
그녀를 찾은 것이다.
이건 그녀에게
자신을 즐겁게 해줄 힘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도 된다.
특히
신군 스스로가 늘 비웃었던
채경의 그 푼수짓까지 인정한다.
그 푼수짓이 그를 위로할 힘이 있다고 밝히는 것이다.
자신이 그녀를 필요로 했을 때
율군과 함께 있는 모습과 그녀의 눈물, 그리고
천진한 백허그에 이어
한층 아름다와진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그의 관심은 마침내
무의식에서
의식 위로 떠오르고,
파티장에서의 신데렐라 의식은
그녀에 대한 그의 인식이 이제 완전히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되겠다.
그녀에 대한 관심이 무의식에서
의식 위로 살짝 떠오른 것이다.
그 관심이 형체를 보다 뚜렷하게 하는 것이
바로 처가 나들이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