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16부- 효린의 자살기도
궁에는 이해가 잘 안가는 인물이 의외로 많지만,
바로 그 중 하나가 효린이라는 인물인데,
앞뒤가 맞지 않기로는
후반의 채경 뺨친다.
물론,
현실의 우리는
효린 같을 수 있다.
말과 생각과 돌아가는 상황은 늘 다른 법이고,
그 상황에 따라서
말과 생각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드라마의 캐릭터가 그러는 건 좀 곤란하다.
드라마의 캐릭터는
물론 드라마 속에선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지만,
대외적으론 상징적인 존재니까.
그런 인물형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지나치게 표리부동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아서
보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건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효린은 신군이 황태자 노릇에 염증을 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여러 정황이 나온다.
현실성이 있는가는 둘째치고
일단 어린애들이니
황태자를 그만 둔 후에
우리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한참 사이 좋은 시절엔
얘기를 나눴을수도 있다.
실제로 신군은 때가 되면
황태자 노릇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 지겨운 노릇을 참고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간 그만둘 거니까.
하지만 황태자로 있는 동안엔 그 누구보다
황태자다운 인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
신군의 자존심이었다.
꼭 황족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성격인 듯 하다.
그래서 그는 마음에도 없는 황태자 노릇을
그럴 듯 하게 해냄과 동시에
지루하기 그지 없는 일과도 황태자 교육도
꼬박꼬박 모두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도
황태자 노릇을 그만두기 전에 가례를 올려야할 상황이 된 것이다.
국혼이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대외적 행사이다.
또한 국가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기왕이면
좋아하는 효린과 결혼하길 바랬지만
효린에게 거절당한 후론
채경과의 혼인에 몇 가지 조건을 내건 후에
그냥 임해버린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 있었던 건지,
어차피
몇 년 후면 그만둘 황태자 노릇이니
그 전에 합방만 하지 않으면
낯선 여자애, 그다지 마음도 끌리지 않는
여자애와의 공식적인 결혼 따위는....
그런데 뜻밖에도
그 결혼은
그에겐 일종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로 인해 그는 변화하기 시작하고,
당연한 결과로
결혼 초기까지는 그래도 아릿하게 마음 속에 남아 있던
효린의 그림자는
급속도로 약해진다.
효린은
여자의 직감으로 그걸 느끼고 몸이 달기 시작한다.
누구보다 자신만이 신군을 잘 알고 있으며,
신군은 다른 여자를 사랑할 인물이 못되며,
여자는 그의 생애에 자신뿐일 거라는 자만심이
차츰 힘을 잃어간다.
그래서 그녀는 이성을 잃기 시작한다.
태국으로 달려가서 떼를 쓰는가 하면
그 일이 대문짝만하게 찍혀서
신문에 실리는 바람에
황태자 노릇만큼은 누구보다 잘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신군에게 좌절감을 주었음에도,
그가 그런 망신을 당한 이유가
마지막으로 남친 노릇을 해주기 위한 희생이었음에도
다시 서점으로 불러내는 짓거리를 한다.
물론
그녀는 미안해 어쩌구 하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다시금 뭔가 애틋한 분위기를 조성해보려고 했을 것이다.
물불 안가리고
예전의 그들이 가졌던,
둘만의 세계로 다시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된 효린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신군은 그것이 이별의 선물이었고,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선다.
효린은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할 수가 없다.
인정하는 순간,
그녀는 나락으로 떨어지니까.
그녀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은,
기어이
그의 입을 통해서
채경이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이다.
사실 여자는
그런 극단적인 말을 듣고
밑바닥까지 떨어져야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긴 하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잃어버린 사랑과 그 사랑이 주는 추억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그 집착에 찬물을 끼얹는 확실하고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어야만 마지막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뭔가 극단적인 일을 벌이고,
그래야만 겨우 그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효린의 경우엔
신군이 채경을 좋아한다고 선언하는 순간이 되겠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약을 먹는다.
이 대목에서
난 신군만큼이나 놀랐다.
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아직 어린 19세의,
사춘기를 막 벗어났지만,
그래도 성인은 아닌
애매한 시기의 청춘들이지만,
하나같이
그럴듯한 껍질로 자신의 본질을 가리고 있다.
채경의 경우엔 대책 없는 푼수에 막무가내 소녀,
신군의 경우엔 냉소적인 싸가지와 근엄한 황태자의 껍질,
율군은 자상하고 배려 깊고 애정 깊으며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와의 돈독한 관계처럼 보이는 껍질,
그리고 효린은 우아하고 고고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함의 껍질
등이었다.
궁은
극이 진행되면서
그들이 입고 있던 그 시절의 그 껍질을 깨고
나이가 어린만큼 당연히 깨져나가는 자신을 봐야하는
상처를 딛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이 입고 있는 가식의 껍질을 깨는 것이다.
효린의 경우엔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껍질을 깨는데
바로 자살 소동이다.
가장 효린답지 않은 방법으로
신군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누가 널 흔든대? 날 그렇게 몰라?'
라며 끝내 자신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솔직할 수 없었던 효린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데,
학교 화장실에서 약을 먹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자살할 생각이 있었을까?
아니라고본다.
정말 자살할 생각이었다면 학교 화장실에서 약 몇알 먹는 생쇼를 벌일 리가 없다.
그건 체통을 하늘처럼 중요시하는
신군에 대한 보복이다.
신군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녀의 행동의 이면에 뭐가 있는지.
그래서 그는
걱정하는 채경에게
소리친다.
'니가 그따위 일로 마음 쓰는 게 싫어~!!'
그렇다.
그에겐 효린의 자살 소동은 그따위 일이다.
그건 효린이 그에게 더이상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이
자신을 겨냥한,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복수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자연히 언론의 관심을 살 것이고,
언론이란 원래 소설 쓰기 좋아하며,
가장 대중의 입맛에 맞는 평가를 내린다.
황태자가 실컷 데리고 놀다가 막상 혼인은 다른 여자랑 했다는
선정적인 기사로
신군을 희대의 방탕아로 만드는 짓만큼
그에게 치명적인 복수가 또 있을까?
효린을 문병한 신군은 어두운 표정이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냉정하다.
거의 냉혹할 정도로 무표정하다.
죄의식이나 미안함은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자살 소동 이면에 있는 심리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다.
'그렇게 내가 미웠니? 그런 짓을 할 만큼?'
한 여자가 자기로 인해 자살을 기도했다.
라는 사실은 아직 어린 신군에겐 크나큰 상처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앞서 말했듯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사건의 핵심만 보기에,
절대로 감성에 휘둘려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효린이 만일 그런 점을 몰랐다면,
그 역시 신군을 상실한 이유일 것이다.
신군이 어떤 인물인지 몰랐던 것이다.
자살 소동은 오히려 치명적이라는 걸 그녀는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효린은 신군을 잘 모르나보다.
갑자기 로잘라인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로잘라인의 예는
그들 관계에 전혀 걸맞지 않다.
왜냐면,
로잘라인은
로미와줄리엣의 사랑에
엑스트라도 못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로잘라인은
아예
로미오를 사랑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사랑을 거부한 인물인 것이다.
로미오의 입을 통해서 설명된 그녀는
수녀가 되겠다는 여인이다.
그래서 로미오 아닌 그 어떤 남자의 사랑도
거부하는 인물로 나온다.
하긴, 자기 자신의 꿈이 더 중요해서
남자의 사랑을 거부하거나, 남의 진실을 하찮게 취급한 걸로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효린보단,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신군에게 돌진한 채경이
신군을 가지게 된 것도 상황으로 볼 땐 비슷하다.
그러나 로잘라인의 경우에 효린 자신을 대입시키는 건
넌센스이다.
효린은 절대로 로잘라인이 될 수가 없다.
신군도 로미오가 아니다.
신군은 로미오처럼 사랑에 목을 맬 수 있을만큼
생의 구조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생의 구조가 복잡했기에
채경이가 구원의 여인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라 효린의 엉뚱한 말은
나를 안타깝게 한다.
아직도 효린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효린은 신군에 대한 보복으로
보란듯한 생쇼를 벌인 것이며,
그 생쇼는 그녀의 의도대로
신군을 궁지에 몰리게 하며
그녀는 밑바닥까지 떨어져서 이제 다시 기어오르는 일만 남았고,
실제로 모든 사건은 그렇게 진행된다.
지금 내 기억에 남은 효린은
율군 생파에서 다정한 신군과 채경을 바라보는.
채경에게 꼼짝도 못하고 하라는대로 하는 뜻밖의 신군을 보는
초췌하고 초라한 모습뿐이다.
같은 여자의 입장으로 가슴이 좀 아프긴 하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