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작품과 인물

사랑스러운 영화'아는 여자'

모놀로그 2023. 9. 17. 19:21

가끔 소장 영화 목록을 죽 훑어보자니,

한때 즐겨 보던 영화들에게서 하나 같이

피와 폭력의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사랑스럽고 귀여운, 그러나 다소 엉뚱한

영화로 남아 있는 '아는 여자'를 건드려본다.

 

'장진'영화 특유의 썰렁한 듯 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독특한 유머 감각 속의 깊이 있는 대사와 캐릭터 때문에

난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것은 오로지 장진 만의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킬러들의 수다'가 그랬듯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장진 감독만의 순수함이다.

 

사랑 영화지만,

그 흔한 키스씬 하나 없고, 스킨쉽마저 없음에도

사랑에 대한 특별한 고찰을

천진하다시피 풀어가는 서사엔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아는 여자는

그 중에서도 독창적이고 새롭고, 그럼에도 사랑스럽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난데없는 대사들은 웃음을 주면서도

동시에 심금을 울린다.

시트콤 같기도 하고, 연극 무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장면들은 숨을 죽이게 한다.

 

 

그의 영화엔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일명 페르소나라 불리는 '정재영'배우는

내겐 웬지 모르게 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연기자이다.

 

묵직하고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느낌이 물씬하지만

'아는 여자'에선 그 묵직함이나 남성적 마초적인 느낌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효과를 자아내어 그의 지나친 순수함과 엉뚱함이 돋보인다.

 

청순하고 어리버리하게 생긴 배우가 맡았다면

아마 정재영이 연기한 '동치성'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4차원적인 이나영과의 조합도 재미있다.

 

장진 감독스러운 대사들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단 한 마디도 흘려들을 수 없다.

 

그것들은 장면을 압도하고, 캐릭터를 규정짓는다.

 

그래서 장진 감독 영화는 어른들의 동화같기도 하다.

아주 재밌고, 잠시도 눈을 뗼 수가 없는 책 한권을 읽는,

혹은 연극 한편을 보고 있는 착각을 일으킨다.

 

내겐 '아는 여자'는

새롭고, 내가 원하는 뭔가가 모두 담겨 있는 사랑스러우면서 무겁고

그러나 그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승화시켜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은 진실, 혹은 진리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보기 드문 영화이다.

 

기분이 우울할 때, 사는 것이 버거울 때

난 '아는 여자'를 본다.

 

그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매장면 삽입되는 재치있고,즐거운 영상들이

날 즐겁게 한다.

 

아마도 장진 감독의 영화 속의 메시지 전달법이

나와 코드가 맞기 때문일 것이다.

 

 

 추신

 

마지막 장면에서 동치성은 송구 한번이면 

승리로 끝날 게임에서,

난데없이 그 공을 관중석으로 날려버린다.

 

갑자기 그의 곁으로 날아들어온 한이연의

'만일 투수가 공을 1루수가 아닌, 관중석으로 던진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라는 질문을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게임에서 마지막 타구를 투수앞 땅볼로 잡아낸

동치성은 그 공을 1루수에게 던지지 않고,

한이연의 말을 생각해낸다.

 

누군가는 그 공을 관중석으로 던지면 2루타가 된다는

엉뚱한 소릴 하는데,

그 장면에서 그런 대답은 진실로, 진실로 우스꽝스럽다.

 

그 장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드디어 '첫사랑'을 찾은 동치성이

그 첫사랑에게 들려주는 답이다.

 

그 공을 1루수가 아닌,

관중석으로 날려보냈을 때,

모든 관례와 편견, 습관,규칙을 파괴했을 때,

기존에 우리가 얽매여 있던 모든 관습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사회의 시선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첫사랑'에 대한 동치성의 강박적 편견을 깨뜨리는

한이연의 사랑과,

그것에 대한 그의 응답일 것이다.

 

'아는 여자'는 그렇게

우리를 옥죄는, 혹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케케묵은 옷을 벗어던졌을 때의 자유로움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한이연의 사랑이 그러했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