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신군에 대하여
황태자 이신...
정서적 나이는 5세 가량에서 정체중..
육체적 나이는 전형적인 청소년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애매한 19세
정치적 나이는 30대..
참으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늘 눈을 내리깔고
필요한 말 외엔 입을 여는 법이 없고
책과 음악으로
세상과 벽을 쌓고 있는 인물...
어둠이 그를 감싸고 있다.
그 어둠의 이름은 외로움..
그러나 외로움을 외로움이라 이름지을 수도 없을만큼
그에겐 친구같은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
그를 일컬어 대개는 싸가지 왕자라고 부른다.
지훈군은 유약하고 유우부단하다고도 한다.
신군을 싫어하는 부류는 답답하고 찌질스런 남자라고까지 한다.
과연 신군은 어떤 인물일까?
지훈군이 너무 생생하게 재현해줘서
난 그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룬 느낌이 든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속속들이 알 것만 같은...
지훈군이 그를 우유부단한 인물이라고 해석한 것이 조금 의아하다.
그는 표현력이 약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것과 우유부단한 것은 좀 다르지 않을까?
확실히 신군이 채경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이긴 하다.
그러나 그보단
상대에 대한 배려가 더 많이 깔려 있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불행해질거라는 강박관념,
즉 궁에서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는 아이라는 고정관념이
신군에겐 있었다.
평생을 궁에서 살다시피한 자신도 궁이 지겨운데
하물며 요조숙녀로서 명문가 규수다운 교육도 받지 않고
야생마처럼 자란 채경이
엄격하고 미묘한 궁에서의 삶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
그는 자신이 없다.
물론
그 이면엔 끝내 채경의 사랑에 대한 자신이 없음도 한 몫한다.
그는 자신이 황태자가 아니면
채경이 자신을 떠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어느덧 자신의 정체성을 황태자라는 껍데기 속에서
찾으려 한다.
황태자로서만 살아왔고 대우받았을 뿐
인간 이신
한 남자로서의 이신으로 대해준 사람은
없기 떄문이다.
물론 단 한 사람
효린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그의 껍질을 깨기엔 심히 부족할 정도로
스스로도 단단한 껍질에 에워싸인 인물이었으니
그녀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그녀를 통해서
자신이 꿀 수 없는 꿈을 보았을 뿐이다.
하여튼
그는 채경에게 몇번이고
황태자가 아니라도
황태자가 아니라면
황태자가 아닌데
라는 식으로
자신 없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우유부단이라기보단
황태자로서만 살아온 인간이
그 옷을 벗어던졌을 때
뭐가 남을까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비극은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가 아니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즉
그는 자신이 황태자가 아닌
평범한 황족이었던 시절을 5년 간 살았던 것이다.
그 5년 간은 그에겐
물론
아주 실낱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어떻든 그 5년 동안
그는 엄마 혹은 아빠라는 용어를 입에 담아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엄격한 황족으로서의 교육도 자신을 국가의 한 기관에 불과한
황태자로만 대해주는 부모님이 아닌
아들로 대해주던 시절을
그는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애초에 황태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궁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황태손이 되고
이어서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면?
그는 별 불만 없이
이게 자기 삶이려니 하면서
황태자의 삶을 살았을 것이고
그렇게 냉소적인 인간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의 아들로써
황궁에서 살았고
그래서 스스로 황태손이라는 자부심을
어릴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율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운명은 예상치 않게
그들의 지위를 바꿔 놓았다.
5살 무렵의 두 사람이 한 장면에 나온 적이 있다.
거기서
두 사람이 어떻게 처지가 바뀌었으며
처지가 바뀜으로써
어떻게 성격도 바뀌었는지
강하고 거만한 꼬마였던 율이
어떻게 외유내강할 수밖에 없었던지
또한 예민 섬세하고 유약한 신이
어떻게 냉소적이고 싸가지 없는 인간이 되었는지
아주 짧은 장면이지만
잘 보여주고 있다.
이건 여담이지만
만일 율이 계속 황태손에서 황태자로까지 지위가 이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논란도 좀 있었고
사랑이라면 그저 환장하는 여인네들은
율의 사랑에 눈물지으며
뒤바뀐 운명으로 인해 자신의 아내가 되었을 여자가
형수가 되는 바람에
불가능한 사랑에 목매는 율을 위해 가슴을 쳤지만
난 만일 율이 황태자였다면
아예 채경과의 혼인을 거부했을 거란 것에
백원을 거는 바이다.
왜냐면 황태자로 태어나서 자란 그는
신처럼 냉소적일 필요도
스스로를 내던진 듯한 자포자기한 삶을 살 필요도
연기를 하듯 자신의 삶을 멀찌기서 구경하는
방관자적인 삶의 태도를 구사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가장 황태자스러운 정신 세계를 가졌을 것이
뻔하기 떄문이다.
신군처럼 사가에서 지내본 기억이 없고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회의를 하고
방황을 하겠는가~!
그저 황족이고 황태자이며
장차 황제가 될 인물로
성장하고
그것에 전혀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는
적통성까지 지닌
그야말로 황태자스러운 인물이었을 것이며
어릴 때의 그의 행태로 보아
신군의 냉소적인 오만과는 또 다른
훨씬 단순하게 오만한 인간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런 그가
말도 안되는 서민과의 혼인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다.
그는 명문거족의 딸과의 정략 결혼을 추구할 타입의 인간이다.
그가 사랑에 눈물지으며 사랑에 목숨거는 인간이 된 것은
그가 원래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신군이
그렇듯이
후천적인 환경 탓이며
모든 것을 빼앗겨본 인간이기 때문이지
그가 정말
사랑에 목숨거는 타입의 인간이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다시 신군의 얘기로 돌아가서
그는 확실히 매우 유약한 인물이다.
우선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장 그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모습인
5세 경의 그를 보도록 하자.
5세면 유아기를 막 벗어날 무렵이다.
5세 무렵의 그가 두어 장면 나오는데
그 짧은 장면만으로
대략 그의 본질이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첫쨰로,
그는 정이 많은 성격이다.
율이를 보자 반가운 듯이
이름을 부르며 달려간다.
하나뿐인 사촌
것두 같은 또래인 사촌을 만나는 어린 아이의
반가움과 정에 넘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내 율에게 쥐어박힌다.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황태손저하라고 부르라는 명령 뿐이다.
어떤 친밀감도 정감도 거기엔 없다.
역시 사가에서 정을 주고받으며 자란 신과
황태손으로 태어나서 어릴 떄부터
황제가 될 몸이라는 자부심이
몸에 배인 율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장면이다.
율에게 야단 맞는 신의 표정을 보자.
반항은 커녕
겁에 질려서 혹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는 듯
멀거니 그러나 매우 유순하게 율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황태손저하라고 불러보라는 명령을 받자
순순히 시키는대로 한다.
그는 그렇게 정많고 유약하고 섬세하고 겁도 좀 많은
소심한 아이였던 것이다.
만일 그가
율과 비슷한 성격의 아이였다면
황태자로 살아가는 것에
그토록 염증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한 장면
마침내 하루 아침에 황태손이 되어 입궁하고
황태자 자리에 올랐을 때
엄마가 이제부터 엄마가 아닌
어마마마가 되고
아버지는 폐하가 되어
더이상은 다정하게 안아주지도 어리광을 부리지도 못하게 되었을 때
주변에서 쉴새 없이 들려오는
넌 황태자이다
넌 황제가 될 몸이다.
넌 특별하다
라는 소리들이 유령의 합창처럼
어린 신의 귀에 메아리칠 때
그는 커다란 눈에 금새라도 눈물이 고일 듯
겁에 질려서
그러나 반항하면 큰일날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렇다.
그는 유약하고 정많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서
황태자로서 살아가면서
그는 점점 내면을 감추고
껍질을 두텁게 하여
그 본질이 상처받지 않도록 단단하게 방어한다.
그의 방어벽은 무관심과 냉소이다.
그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이다.
그러나
황실의 일원으로서
명예를 지키고 황족다운 품위와
황태자의 기품을 갖추려는 노력도 병행한다.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이
그의 유약하고 자존심 강한 성격과 부합되어
일으킨 화확작용이다.
그는 비록 부모 앞에선 반항하는 사춘기 소년인 척
연기를 하지만
대중 앞에선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황태자스럽다.
그는 황족들의 일반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정신 구조의 매카니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겐 황족으로서의 명예를 유지하고
국민들에게 황족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생명 같은 일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못할 짓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 바닥에서 14년을 황태자로서 산 덕분에
그는
복잡미묘한 황족들의 세계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자신 알게 모르게
그것에 오염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냉소적인 그가
국민들이나 언론 앞에선 기꺼이 황태자다운 포즈를 취해주며
연기를 한다.
그가 진정 정신 세계가 완벽하게 황태자스럽지 않다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채경 같은 애와 혼인하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하는
맹점이다.
채경은 황족으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이 보기엔
상당히 혐오스런 존재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린
허전함
뭔지 모를 허기증
권태로움
짜증
등등이 모여서
뭔가 획기적인 것을 기대하는 일말의 틈새로
채경이란 아이와 부부가 될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가 그 아이와 혼인하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 아이가 궁에 들어와서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그 황당한 짓거리들을 감당할 상궁나인들이며 내관들
황후와 황제
등등을 상상하며
그는 남몰래 미소짓고
권태롭고 숨막힐 것 같은 삶에
한 줄기 재미라도 주길 바라는 것이다.
채경이에게 말했듯
자신 속에 숨겨진 것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하나씩 부숴져가는 것을
그는 경험한다.
그가 바랬듯이
황당하게 된 것은
오히려 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 것이다.
효린을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약하고 정많고 소심하고 예민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하나씩 끄집어내준다.
겉으론 차갑고 못된 인간의 표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원래부터 그런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