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김장, 그리고,세월
난 김장 김치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왜냐면 그땐 내가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땐 딤채 따위가 아니라 뜰에 파묻은 장독에 김치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딤채가 아무리 좋다 한들,
땅 속에서 서서히 익어가던 그 김치의 맛을 따를 수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뜰이 있다면
예전처럼 그렇게 땅 속의 딤채를 만들어서
그 시원하고 독특한 김장 김치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
우리 집 김장은,내가 기억하기론,
어렸을 땐 백포기 쯤 했던 것 같고,
무슨 잔치처럼 집안이 난리가 났었던 것 같다.
누가 했는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시엔 '식모'라고 불리던 '가사도우미'와, 엄마,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 엄청난 양의 김장을 해치웠다.
난 김장독을 열어 깊숙히에 드문드문 묻혀있던 김장무를 잔뜩 꺼내서
젓가락으로 찍어서 밥에 물을 말아
한 그릇 뚝닥하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딤채로는 그 맛을 낼 수가 없고, 김장은 더이상 그때처럼 맛있지도 않다.
왜냐면...지금은 21세기니까.
땅의 질도 변했고,공기도 탁해졌고,
비료도 달라졌으며 기후도, 배추도,양념도 모든 것이
그때 그 시절의 맛을 낼 수가 없다.
사람도,땅도,채소도,모두 변했다.
그래서 음식 맛도 달라졌고,무엇보다 우리 입맛도 변했다.
지금은 대개 김치를 사 먹는다고 한다.
난 다른 건 몰라도,고추장, 된장, 그리고 김치는 사먹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 아무도 고추장, 된장, 그리고 김장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걸?
20대 쯤의 우리 집 김장 내지 장은 외숙모가 맡아서 해주었다.
엄마의 올케들이다.
그분들은 그때 40 대 쯤이 아니었을까?
엄마가 직장에 나가는 바람에
외숙모들이 오셔서 엄청난 김장과, 맛있는 동치미와, 총각 김치
등등겨울 양식을 잔뜩 땅에 묻고 꽁꽁 여며주고 가셨다.
그때, 난 내 방에서 딩굴고 있었다.
김장 때문에 일찍 퇴근한 엄마는
조금 일하고 허리가 아프다고 징징대며 방바닥에서 딩구는 내게
한 접시의 생굴을 가져다주며 몸조리 잘 하라고 해주었다.
난 천진난만하게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도 없이 그 생굴을 먹었고, 그 결과물인 맛있는 김장을 겨우내 즐겼다.
추운 겨울밤,김치를 꺼내려 뜰에 나가서 독을 열고 김치를 꺼내면
시원하고, 그 기막히게 맛있던 김치..
난 그때 외숙모들이 해주던 김장 맛을 잊지 못하여
아마 김치 매니아가 된 것 같다.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던 기억.
시원한 김치 국물에 국수 말아먹던 기억,
물말아서 김치 하나로 밥을 몇 그릇이고 뚝딱하던 기억....
언젠가부터 퇴직한 엄마가 홀로 김장을 해서,
당시 독립해서 살고 있던 내게 어마어마하게 큰 통에다 겉저리를 보내주곤 했다.
난 그걸로 이듬해 김장을 새로 가져다 주기까지 맛있게 밥을 먹었다.
집에 들어가면서, 어느덧 난 김장에 동참했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건강하고 씩씩하게 그 김장을 혼자 해냈던,난 당연하게 생각했다.
엄마는 그때 지금의 내 나이 언저리였는데,
지금의 나는 거의 병자처럼 빌빌거리지만,
엄마는 기운이 넘쳐흘렀다.
평생 직장생활에 지쳐서 늘 병약했던 엄마가 퇴직을 하고나니
갑자기 무지하게 힘이 넘치는 아줌마가 되었던 것이다.
그 추운 겨울에 혼자서 역시나 엄청 많은 김장을 혼자 해내었고
김치는 더 이상은 맛있지 않았다.그때 우리는 이미 독을 묻을 땅이 없는 곳에 살고 있었으니까.
딤채라는 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어느 정도 문제거리를 해결해서
제법 기능이 좋아질 무렵,우리 집에도 딤채가 들어왔고,
그 무렵엔 숙성한 김치가 엄청나게 싱싱하고 맛있어서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엄마와 나만 집에 남고 모두 떠났다.그래서 겨울이 되면둘이서 김장을 했다.
난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한다.김치만 맛있으면 더이상 다른 반찬이 필요없지만,
김치가 맛없거나 김치가 없으면 식욕을 잃어버리고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는 겨울만 되면 열심히 김장을 했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제 혼자가 아니라,나와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점점 세월이 흘러 김장의 무게는 내게 더 실려왔다.
그만큼 엄마는 나이가 들었으니까.
김장이 맛있게 되면,난 밥을 잘 먹었다.
어느 해인가,난 김치 네통을 혼자 모조리 먹어 치운 적이 있다.
어찌나 맛있었는지그 해 겨울은 다른 반찬이 필요없었고,밥이 먹기 싫다고 징징대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더 세월이 흐르며엄마는 늙어가고, 난 건강이 나빠졌다.
그래서 김장 맛도 다시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젠 김장은 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우리나라 김치는 단지 김치가 아니다.
김치 찌개,김치국,김치 볶음밥 등등 ,김치의 쓰임새는 엄청나다.
그래서 결국엔 김장을 하게 된다.하지만 양이 조금씩 줄어간다.
힘이 드는 것이다.
내 몸은 점점 더 약해지고
오늘...마침내 난 김장을 거의 혼자 하다시피 했는데,
2년 연속 조금밖에 안했음에도 두 번 다 실패했기 때문에
더는 하기가 싫었지만,동시에 안 하고는 못배기는 게 김치이다.
사실, 난 예전처럼 김치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입맛이 변해가는지
평양 냉면, 만두, 국수, 밀가루로 만들어진 모든 음식, 등등
나이가 들면 평소 좋아했던 음식을 싫어하게 된다던가..죽을 때가 된 거라던가....
아버지도 말년에 그토록 좋아했던 음식들을 모두 싫어하게 되셨었고
엄마도 차츰 그러하다. 그토록 좋아했던 빵을 지금은 싫어한다.
난 내가 좋아했던 모든 음식들,
파스타며, 중화요리며,곱창전골이며,아구찜이며
기타 등등 모두 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치도 그러하다.그럼에도 오늘 난 다시 김장을 하고 말았다.
겨우 6포기만 했음에도,
난 결국 중간에 기절하다시피
바리움을 두 번이나 먹으며 버티다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웬만하면 입에도 대지 않는 타이레놀과 쌍화탕까지 먹고 쓰러져 몇 시간을 자고 말았다.
이렇게 몸이 급격히 약해지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사는 게 점점 더 재미없다는 것
그저 힘들기만 하고 벅차기만 하다는 것을 절감할 뿐이다....
해마다, 이젠 다신 김장하지 말자고
엄마와 다짐 하지만 결국은 하게 되는 김장, 그러고보면 난 역시 구세대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해준 맜있는 김치에 길들여진 내 입맛의 기억은
그때 그 시절의 그 맛을 기억하며 그것을 재현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망한다.
난, 정말로 이 세상이 점점 살기가 힘들다.재미없고,지루하고,역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