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캐릭터,그리고 배우들
내가 홀릭한 드라마들이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그게 드라마인지, 특정 캐릭터인지 잘 모르겠다.
이른바,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 자타가 공인한 명작들이 있다.
그 중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작품도 있지만, 나도 기꺼이 내 명작 반열에 이름을 올린 드라마들은
그만큼의 대중적 인기도 누린다.
우선, 내가 홀릭한 마지막 드라마들은, 그 드라마보단, 캐릭터에 홀릭해서 더욱 더 빠져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줄리엣의 남자'가 나의 드라마 홀릭에 첫테이프를 끓었다.
그때가 2001년 쯤인데, 이전엔 난 아이돌 가수나, 배우나, 드라마나, 영화에
홀릭해본 적이 없다.
정확히 20세기 마지막 한해였던 90년 대는,
내가 좋아하는 건, 가요나 드라마, 혹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들과는 아주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에 온갖 스포츠에 미쳐 살았다. 특히 야구광이었다.
그 이전엔 농구와 배구에도 열광했다.
대중문화완 담을 쌓고 살았던 내 드라마 시대에 포문을 연 것이
'줄리엣의 남자'인데, 뭐랄까..그때까지 우리나라 드라마의 공식을 완전히 깬,
즉 잘생기고 돈많고 뭐든 척척 해결해줄 힘이 있는 왕자님과
청순가련하고 가난한 아가씨와의 사랑 얘기가 판을 치던 드라마판, 혹은 그 사랑에 온갖 방해를 일삼는 주변 인간들,
그 너절하고도 진부한 스토리와 싫증나는 스타들의 얼굴을 외면하던 내겐,
이름도 잘 모르는 신인급 배우들과, 이른바 스타급이긴 했지만
경박한 오버 연기로 사람 정신머리를 빼놓는 차태현이라는 어린 배우가 날뛰는이상한 드라마였지만,
서로 웬수처럼 여기는 두 남녀가, 자신의 이해 관계에 의한 동거를 하면서, 차츰 정들어가다가
결국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처지의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다는,
한때 유행했던 드라마 공식의 첫 주자가 되겠다.
하지만, 대개의 드런 드라마들이 온갖 험한 과정 끝에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는 것에
비해서, 남주가 서브와 연결되버리는 엔딩을 맞이하고, 엄청난 팬들의 비난에 시달렸지만,
사실,내가 보기엔 그게 오히려 그 드라마엔 어울리는 엔딩이라고 생각한다.
결말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드라마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의 해피 엔딩에 대한 강박 관념을 내가 처음 체감한 드라마도 되겠다.난 당연히 두 주인공이 맺어지기 힘든 상황이라고 생각했기에,만일 어거지로 이어졌다면, 글쎼...적어도 내겐 그렇고 그런 드라마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마치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듯,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드라마였고, 바로 그 신선함과 독창적인 캐릭터와 대사들, 장면들이 내가 홀릭한 이유이다.
보면 볼수록 기기묘묘한 대본과 대사들과(그런데 극본이 다름 아닌 박계옥), 캐릭터들이 좌충우돌하는가 하면
한편으론 바로 그 눈물젖은 진부한 멜로 스토리가 병행하는,
그러나 새로운 영상미에 특이한 장면들로 가득차고,
듣도 보도 못한 21세기 형의 대사들이 줄줄 쏟아지는가 하면,
마지막 즈음엔 생각지도 않게 눈물샘을 자극해서, 눈물 콧물을 쏟으며 보게 만들었던,
그래서 내가 처음 맞이한 온라인 생활에 그 포문을 열고 맹활약을 시작하게끔 했던
기념비적인 드라마이다.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컴퓨터를 사고, 이른바 초고속 인터넷망이라는 게
처음 깔렸던 그 시절,컴퓨터가 뭔지도 모르고, 인터넷을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던 생초보인 내가
제일 먼저 검색이라는 걸 해서 들어간 것이
'줄리엣의 남자'의 홈페이지.
그리고 난 거침없이 온라인에 첫 글을 올리는 것으로 온라인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물론, 당시의 온라인은 지금과는 천지차이이다. 내가 온라인에 전혀 글을 쓰지 않고,
열심히 글을 올리던 블로그도 몇 년이나 방치한 것도 온라인이 망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주옥같은 드라마 리뷰어들이 즐비하고,각종 드라마 리뷰들이 논문 저리가라할 정도의 필력을 자랑하는 글쟁이들이 난무하는커뮤니티들도 그땐 정말 청정했다.
글로 싸우거나, 욕지거리를 하거나,비방을 하거나,선동을 하는,
지금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온갖 치태들이 그땐 당연히 없었다.
공기가 맑았듯, 그때의 온라인도 청정했다.
지금은 거물이 된 '김어준'이 막 '딴지'라는 사이트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다.
참 그리운 시절이다.
참고로, 난 그게 실존 남친이건, 관념적 세상의 캐릭터건, 배우건,
1 년 이상 좋아하는 게 불가능한 인간이다.
배우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의 캐릭터를 연기한 그 순간에 한정해서만 좋아한다.
하긴 그 시절엔 배우를 좋아한다는 건 내겐 거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러니까 팬질이라는 것도, 배우가 아니라,내가 좋아한 캐릭터를 연기했기에
그 배우까지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랄까.
그러니 흔히 말하는 팬덤에서 활동하긴 했지만, 반쯤은 재미였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 특유의 성격도 있었으며
속으론 1년짜리라는 한계를 이미 알고 있기에 아낌없이 모든 열정을 쏟아붓다가, 가차없이 돌아서곤 했다.
모든 건 내겐 유희였다. 진정성 넘치는 1년 짜리 유희??
정확히 1년 후엔 '명랑소녀성공기'의 한기태에 홀릭했고, 그 드라마도 좋아했다.
이 드라마도 왕자와 신데렐라 스토리를 살짝 비틀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왕자,그런데 엄청 싸가지 없고 성격 이상한 넘과, 가난하지만 자신의 가난에 전혀 콤플렉스가 없는,
당당하고 현실적이어서 곤경에 처하게 되고 사회적 지위가 흔들리는 왕자를 보호하는 역할의 캔디형 여주가
탄생한 첫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후로 난립한 드라마들이 이런 싸가지 왕자와 초라한 아가씨와의 투닥거림으로인기를 끈다.
궁도 결국엔 그러한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후엔, 아예,싸가지와 현실적이면서 싸가지를 사모하는 여주와의 동거 끝에 찐사랑으로 이어지는 포맷이 난립하였다.
그런데 그 시조격인 '명소성'이라는 드라마는 후반으로 가면서 전혀 다른 작가가 바통터치를 한 게 아닐까 싶게
드라마의 흐름이나, 캐릭터들이 완전 변질되고 조잡해지면서
정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한기태에 대한 애정은 오래 유지했다. 물론 1년 만...
장혁이라는 배우는, 햇빛속으로라는 드라마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어쩐지 눈에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
보기 드물게 잘생겼지만, 조각 미남이라기보단 애잔한 분위기와 풋풋한 표정을 지녔는가 하면 동시에
양아치스런 거친 내음을 풍기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 배우들이 일찌감치 데뷔해서 스타라는 이름으로 팬덤을 이끌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그들은 탤런트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일찌감치 자리잡고, 스타가 되었고, 광고를 찍어대고, 그리하여 지금의 요상스런 연예계가 탄생하기 직전 세대이다.
개성있는 외모와, 비록 연기는 서툴지만 가능성은 무한하고,
젊음과 매력으로 어필하는 배우들이 마구 쏟아졌다.
명소성 이래로 난 다모에 빠졌고, 순전히 황보윤에 미쳐서 몇 년을 살았고, 1년 짜리 애정의 징크스는 깨졌다.
이후로 궁을 우연히 보다가, 신군과 주지훈에게 빠졌는데,
그때까지와 다른 점은, 주지훈이라는 배우에게 신군만큼 애정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1년 짜리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보다 성장하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배우이다.
이후로도 난 캐릭터에 홀릭하기도 하고, 드라마를 좋아하기도 했지만,더이상 팬덤에 휩쓸리는 열정은 사라졌고,
글도 거의 올리지 않았다.
후반의 드라마 홀릭은,응사였고, 쓰레기였다.
배우는 철저히 아니고, 오로지 드라마와 캐릭터에 매료되었지만,예전같은 열정은 없었다.
내가 좋아하거나, 홀릭하게 되는 캐릭터는 대개,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응사를 보면서, 쓰레기의 딜렘마에 절절하게 몰입당하며 그의 상실감이 나를 아프게 하였다.
이후로 좋은 드라마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맘에 들거나 눈에 뜨이는 배우도, 캐릭터도 없었다.
대신에 영화에 눈을 돌리면서 좋은 배우들이 넘쳐나고 있음을 알았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희한하게도 내가 드라마에서 조연급으로 활동할 때,
주인공보다 더 매력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류승룡,김윤석,이선균 같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특히 김윤석은, 부활에서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라울 정도로
발성과 안정된 연기와 배우로서 화면 장악력을 보여주어서 놀랐고,이어서 대배우가 되었다.
이선균은 흔한 주연남배우의 친구역이었음에도
주인공에 뒤지지 않는 개성적 연기로 결코 흔해 빠진 연기를 보이지 않아서
아깝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역시 유명 배우가 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내가 우연히 지나치듯 보면서 뭔지 모르게 눈에 들어온 배우들이 있는데,
몇 년 후에 결국은 이름을 떨치며 성공한 케이스의 대표 주자가 '진선규'라는 배우이다.
진선규같은 케이스로 내가 아깝네?
라고 생각한 배우가 성공한 예가 몇 명 더 있다.
실력 있는 배우는, 용모와 무관하게 결국엔 이름을 떨친다.
몇 년 후, '치즈 인더 트랩'이라는 드라마를 무심코 보다가, 간만에 빠져들었다.
거기서도 유정이라는 캐릭터가 생생했고, 그에 대한 연민에 가슴을 조아리며 공감하다가 뒤에 가서 깨갱하면서
멘붕한 집단과 그 분노를 공유했다.
박해진이라는 배우의 어딘지 모르게 애잔해 보이는 외모와 보기 드물게 잘생긴 것이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이후로, 내가 그럭저럭 좋게 본 배우들은 있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배우에게 홀릭하진 않았다.캐릭터 역시 그러했다.
그러던 와중에 오랜 만에 보물을 하나 건졌다고 생각했는데,
'호텔 델루나'의 청명 역을 맡았던 '이도현'이다.
젊은 배우들은 내가 보기엔 누가 누군지 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비슷비슷하거나
무매력이거나, 아이돌 특유의 인형같은 외모로 전혀 배우답지 않은 무개성이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즐비하면서,
좀처럼 스타급으로 성장할 재목이 보이지 않았고,시스템 자체가 그런 배우가 나오기 힘들어진 무렵이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발견한 쳥명은 캐릭터와 배우 모두 내겐 큰 감동이었다.
요즘 보기 힘든 개성과, 분위기, 게다가 연기력과 발성을 모두 갖춘
매력적인 젊은 배우는 오랜만에 발견해서 지금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송혜교와 김은숙 작품을 한다고 해서 무지하게 우려스럽다)
사실, 호텔 델루나는 심심할 때 별 생각없이 보기엔 그만하면 괜찮은 드라마지만,난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엔, 만월과 청명의 사연이 너무 처연해서 심심풀이로 보기엔 부담스럽다.
그 드라마 방영 당시에 난 심한 우울증이었기에, 그렇게 가슴 아픈 사연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지금도 청명이 어차피 죽을 바엔, 한 번이라도 안아보고 싶어 그녀를 끌어안던 장면이 생생하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외치면서도, 차마 찌르지 못하는 그녀를 끌어안음으로써,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을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며, 동시에 그녀의 손에 죽겠다는 것이
청명의 바램이었겠지만, 사실 그것은 만월에겐 엄청 잔혹하고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하지만
청명에게 홀릭하던 내겐 청명의 심정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거기에 죽이겠다고 이를 갈면서도 죽이지 못했던
만월의 그 처절한 눈빛과 눈물과 애증으로 사무친 눈빛도 당시의 내겐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게 아팠다.
그녀를 끌어안는 바람에 만월은 자신의 망설임 속에 생생한 사랑을 새삼 깨닫고 분노했으며, 천년의 원한 속엔
사실 청명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분노가 더 컸을 것이다.
그녀가 그를 기다린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반드시 제 손으로 죽이고야 말겠다는 집념일까.
그를, 혹은 자신을 그토록 증오한 건
그 순간의 망설임이었을까, 자신의 칼에 뛰어들었던 청명에의 원망이었을까.
인간은 자신을 원망할 때, 가장 지독해진다.
그녀를 껴안은 채,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던 그 손길이 어찌나 애잔하던지..ㅜㅜ
이후 같은 장면이 재현될 때, 만월이 대뜸 알아차린 걸 보면, 그 순간은 만월에게도 잊을 수 없는 치명적 아픔이자,
약점이었던 모양이다.
심한 우울증 때문에 고생하던 그 시절,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목놓아 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곤 다신 '호텔 델루나'를 보지 않았다.
사실 그 드라마는 만월 청명 스토리를 빼고 나면 참 지루하고 재미 없는 작품이라고 난 생각한다.
이후로 좋은 드라마들이 마구 쏟아졌는데,
'미스터 션사인'과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등등이다.
이런 드라마들은, 배우나 캐릭터가 아니라 드라마 자체에 홀릭한다.
배우들도 캐릭터도 서사도 흠잡을 데 없는 명작들이다.
덧붙여, 나이 들어도 변함없이 매력적인 이병헌에게 새삼 감탄하기도 했고, 멜로에서 특히나 빛을 발하는
그의 눈빛 연기에 찬사를 보낸다.
무엇보다 변요한이라는 매력적인 배우를 발견했고(난 그를 처음 보았다)
나의 아저씨에선 '아이유'라는 배우를 발견했으며
나의 해방일지에선 '손석구'라는 배우를 또한 알았다.
이지안과 구씨의 지친 듯,
드라이하면서도 처연한 눈빛과 표정들이 오랜 만에 내 감성을 자극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메말라가는 나를 흔들어줄 드라마나 영화가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