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스 : the myth-후회인가, 욕망인가
내가 타임루프라는 장르를 첨이자 마지막 본 작품이 '트라이앵글'이라는 영화였다.
솔직히 그때까지 타임루프라는 장르는 듣도보도 못했기에, 처음 볼 때 조금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웠고,게다가
이해하기 난감했다.
시지프스는 한국 드라마에선 처음 시도한 건 아닌 모양이나, 적어도 내가 본 걸로는 첫 작품이다.
그것도 조승우에 박신혜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한꺼번에 나온다.
또 김별철에 성동일까지. 그들 모두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다.
제목이 그러할진대,
한심하게도 난 그게 루프물일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트라이앵글'에도 시지프스의 그림자가 너무도 명확하게 드리워져 있었음에도...
시지프스야 말로 영원한 루프의 창시자가 아닌가!
신에게 맞서서 죽음을 선고받았지만, 용케도 요리조리 따돌리며 깝죽대다가 천수를 실컷 누리고나서야
비로소 신의 심판을 받는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음탕한 신들이 과연 신이라 불릴 수 있는 절대적 존재인지는 모르겠고,
그 신들이 인간에게 자신을 농락한 벌을 내린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만,
어떻든 그는 너무 많은 힘센 신들을 농락했기에
마침내 죽어서야 이른바 '시지프스의 형벌'이라는 것을 영원불멸하게 받게 되는 것이다.
루프물의 본질은, 시지프스의 정신과는 다르게, '후회'이다.
후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루프를 반복한다.
'트라이앵글'에선 비교적 설득력 있게 그 반복을 설정했다.
주인공이 돌아가는 시점은 자신이 학대해 온 아들이 죽기 직전이다.
그녀는 이번에 돌아가면 학대도 안 하고, 짜증도 안 내고, 죽도록 방치하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되돌아간다.
그때 그녀는 초대받은 요트놀이에 가는 참이었다.
그 놀이에 꼭 가고 싶었던 여자는, 아들 때문에 늦어지는 것에 화를 내며 난폭 운전을 하다가 아이를 죽게 만들었던 것 같다.
잘 기억이 안 나는 부분이다. 너무 끔찍해서 한 번 밖에, 그것도 오래 전에 봤기에 기억이 가물하다.
그 요트놀이에 가면 루프가 이어진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자신이 루프를 깬 순간이다.
그녀는 그때 선택할 수 있었다. 그 루트를 되풀이해봤자,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았을텐데,
하지만 돌이킬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엔 그녀가 자신이 왜 이런 형벌을 받는지 깨닫지만 다시 루프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으로
'이번에야말로' 라는 정신으로 재도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까지 그녀는 배안에 갇혀서 계속 같은 일은 반복하고 있었다.
마지막 루프에서야 그녀는 그곳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그래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그것조차 반복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와서 도망치다가 사고가 나고, 다시 반복하고를 영원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마치 한태술이 루프를 깨는 방법을 찾아내고 자신을 죽였지만,
그것이 루프를 완전히 깨고 운명을 극복했다는 확신을 주는 결말이 아니었듯이,
오히려 다른 방법으로 되풀이 될 여러가지 단서를 줄줄 흘려놓았다는 점에서,
죽음으로 그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드라마 시지프스엔 많은 문제가 있긴 하다.
우선, 16부작으로 만든 것이 첫번째이다.
10부작 정도였으면 훨씬 타이트하고 박진감있는 연출로 지루한 장면들이나,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장면들이
삭제되어 드라마의 윤곽이 훨씬 뚜렷해지고, 애매모호하다는, 지루하다는, 재미없다는, 엉성하다는 느낌을
성급한 시청자들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 돌아가는 시점이 애매한 것이다.
우선, 2001년 이전으로는 가지 못한다는 설정이다.
시그마가 처음 돌아온 시점이 2001년이고, 그게 상한선이다.
그 전으론 돌아갈 수 없는 것 같다.
세째로,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루하게 여긴,불필요하다고 여겨질만큼 길게 단조롭게
이어지는 미래의 이야기는 , 사실 핵전쟁 이후의 무정부 상태의 그야말로 황폐해진 한국을 보여주려는
목적도 중요하지만,즉 핵전쟁의 결과가 어떠한 것이지 보여주려는 것이 크겠지만,
핵심은 결국 서해가 어찌하여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는 루프를 반복하게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그녀는 9살에 눈앞에서 핵폭탄에 희생되는 엄마를 보았고,이후 다시 9년을
벙커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녀가 무감각하다시피하게 서울 한복판을 헤매고 다니는
2035년의 서해는 9년의 벙커 생활에서 소녀기를 보내고 성장하면서
점점 무뎌진 감성과, 삶에 대한 감각, 오로지 살아 남기 위한
군사훈련을 방불케하는 아버지의 훈련 등등으로 이미 9살 소녀 이전의 기억은 거의 소실되다시피한 상태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제정신으로 무심하게 받아들이기란 힘들 것이다.
사실,9살 무렵이면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제대로 인성이 발달할 시기도 아니고, 사춘기도 아니고,
그냥 어린이이다.
일부 시청자들은, 9살까지 멀쩡하게 살았던 애가 불고기를 모를 수 있냐, 바나나를 껍질 째 먹을 수가 있냐
등등으로 시비를 거는데, 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서해가 기억하는 맛있는 음식은 엄마가 만들어줬던 '떡볶이'정도이다.
그것은 엄마의 추억만이 그녀에게 강렬하게 남았고, 나머지는 벙커에서의 9년 동안 지내는 동안
모두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이후로 그녀가 다시 세상에 나온 9년 후의 서울엔 그 시절을 회상하게끔 하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바이킹을 기억하는 것도 엄마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서해에겐 엄마만이 과거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기억이다.
너무나 큰 충격과 두려움을 겪은 아이가 눈앞에서 죽어버린 엄마만이 뚜렷이 남고
나머지 생활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고 본다.
암튼, 2035년과 2021년이 병행에서 번갈아 보여주는데,
2035년의 사건들은 대개 2021년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단지 그 미래의 사건들은 풀어가는 게 너무 산문적이고 지루했을 뿐, 꼭 필요했다.
2035년의 그녀는, 상점을 털다가 다른 무리와 마주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그떄 아버지는 부상을 입는다. 그 상처가 악화되어 항생제가 필요한데,
이미 항생제는 더이상 없다.
그녀는 아버지가 없으면 진짜 혼자 남는다.
두려워진 서해는 목숨을 걸고 항생제를 구하러 멀리 떨어진 병원에 잠입해서
겨우 구하고, 도중에 낭떠러지에 도달, 우찌우찌해서 길을 우회하며 방황하던 끝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자신과 합장된 한태술의 시신이며, 문제의 다이러리를 발견하게 된다.
사실, 그 다이어리는, 단속국이 철저하게 모든 상황을 기록하여 다음의 시그마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업로더를 타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고, 타임머신을 만드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엄마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과감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셈이다.
아마 시작은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한태술과 사랑에 빠지는 정보는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애초에 과거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오로지 세상을 정상화시키고,
엄마를 살려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무궁하게 반복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첫회에서 로또 번호를 줄줄 외는 것으로 봐선, 무수히 반복되던 어느 루프를 우리가 보게 된 것이다.
아니면 그마저 다이어리에 기록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맨몸으로 여자의 몸으로 홀로 되돌아간 서해는 썬의 도움이 절실하기에
그를 낚을 미끼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본 루프에선 한태술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일단은 핵전쟁을 피했고,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결과를 낳지만
시지프스의 형벌은 원래 영원하다.
그러니 그 루프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서 과연 끝난 것인지,
모든 것이 완전히 해결되어 이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인지
답을 주지 않는다.
단지 남아 있는 위험 요소들, 한태산이 가지고 있는 설계도와,아직도 태술을 증오하고 한편으론 동경하는
시그마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2001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마도 그 설계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바로 2001년 이기 때문일 것이다.
타임머신의 태동기, 이런 결과가 올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한태술이
만들어낸 위험 천만한, 시공간을 인간이 맘대로 조정하는 세상이 그 시초를 만들어낸 시점이
2001년이다.
그때로 시그마가 되돌아간 이유는, 그때 가야만, 자신이 부를 쌓아서 한태술에게 투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를 하여 그가 업로더를 개발할 지금을 대주기 위해서, 자신이 세상을 마음껏 조절해서
모조리 없애버리고 자신을 따르는 일부분의 사람들, 즉 범죄자로 구성된 헛깨비 내각과 기타 인간들이
지도자가 되고, 자신은 또한 그들의 지배자가 되는 세상, 보기 싫은 것들은 모두 죽여버리고
자신을 따르는 몇몇 무리만 남기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시간낭비인 것이다.
혹자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린 시그마를 죽이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땐 타임머신의 설계도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이니까 시간낭비이다.
또 그런 생각을 해낼 인간도 없다.
애초에 업로더를 타고 되돌아가서 부를 쌓아 한태술로 하여금 타임머신을 개발할 밑천을 대주어
세상을 차지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할 사람도 시그마 뿐이다.
한태술뿐 아니라, 세상에, 인간에 미칠 듯한 증오와 혐오로 똘똘 뭉친 시그마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는 2035년에 2021년으로 핵을 날렸다.
그가 끌어들인 부랑자 내각은 한 루프마다,10월 30일 경에 외국으로 나간다.
믈론, 한국인의 출국은 철저하게 막아놓은 채(정말 악질이다)
월성의 원전에 날렸다니 일단 지방이 먼저 초토화되었을 것이고,
그 다음은 당연히 자신을 구경만 해도
알아서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마침내 핵까지 터지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그건 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세상에 아주 작은 조약돌 하나만 던져도
알아서 대응하는 시스템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업로더는, 각설탕 정도가 아니라, 인간을, 그리고 어마어마한 핵무기까지
날려보낼 수 있는 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타임머신이다.
하지만 태초의 한태술은 그런 위험한 업로더를 순순히 만들리가 없다.
형을 위협했던지, 총을 들이댔던지 무슨 수를 썼는지
그는 그것을 만들어냈기에 핵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여기까진 내 상상의 영역이지만, 드라마에서 암시해준 여러 근거를 베이스 삼아 만들어본 것들이다.
미래와 현재를 반복해서 비교해 보여주는 것은 큰 패착이었다.
현재를 보다 짜임새있게, 이해하기 쉽게 연출을 잘 해서 의문점을 남기지 않도록 보여주고,
미래는 언뜻 언뜻 보여주기만 했어도
훨씬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어떤 의미에선 대단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대작 드라마, 그것도 타임머신이라는 드라마틱한 소재, 그것을 타고 미래에서 온 여인
다시 말해서 현재를 사는 한태술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같은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서해를 사랑하게 되어
'트라이앵글'의 엄마처럼, 이번 한번만 더...한 번만 더..그녀를 보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못하고
반복해서 서해를 선택하는 비극,
그 사랑도 비극이고, 아픔이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의 두 남녀가
견우 직녀처럼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위험천만한, 아니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시그마에게 굴복한다.
결국, 시지프스 더미스의 비극은, 후회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다.
그리고 시지프스의 형벌 자체가 실은, 후회가 아니라 시지프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죽기 싫었고, 그래서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신들을 농락했고, 그 결과가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회보다는 욕망이 이 드라마의 근원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물론, 박사장 성동일은 후회 때문이고, 단속국의 그 빌어먹을 새끼도 후회 때문이라지만,
후회 또한, 자신이 이미 선택했던 과오, 그리고 그 과오 속엔 비열한 욕망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후회 자체가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
'트라이앵글'의 엄마 또한 자폐 아들이 버겁고 귀찮고 짜증나서 학대하고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아들을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후외의 본질이 욕망인 것이다
드라마에선
시그마의 욕망, 에디의 욕망, 서진의 욕망, 그리고 한태산 형제의 욕망, 거기에 엄마를 되살리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도 보고 싶어하는 서해의 욕망이
서로 맛물며 가며 쳇바퀴를 돈다.
과연 이 루프가 한태술이 죽었다고 멈출까?
시지프스의 형벌은 끝나지 않았다.
한태술의 형벌은 끝났을까?
난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처음엔 드디어 끝났나보다 하고 슬픈 와중에 생각했었다.
한태술도 자신만 없으면 끝날거라 믿고 그토록 두려운 죽음을 택했다.
하지만 시지프스는 죽어서도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한편으론, 한태술이 자신의 가장 큰 욕망을 희생하고 자신을 말살하는 것으로
보상했기에 어쩌면 구원받았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은 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열폭이 근원인 만큼
절대로 멈추지 않을 영원한 비극이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