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작품과 인물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

모놀로그 2022. 8. 19. 08:47

십 여 년동안 나의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취향및 감상 태도는 많이 바뀌었다.

전에는 아주 유명한 영화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에 한정해서 극소수의 영화만을 간헐적으로 보았고,

그 중에서 몇 몇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되기도 했다. 외화도 꽤 보았지만, 한국 영화가 대세를 이룬 후엔 오히려 외국 영화엔 야릇한 거부감을 느끼고 좀 멀리했다.

터미네이터 1 정도가 내 심금을 울린 마지막 외화가 아닌가 싶다. 현실감 제로의 마블 영화나 히어로 영화 혹은 SF 영화치고는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낀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이다. 이후론 타이타닉같은 영화도 보긴 했지만, 남들처럼 디카프리오에 매료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가위손의 조니뎁이 훨씬 매력적이었지만, 다른 작품에선 사양이다. 

본격적으로 게임이나 만화같은 영화들이 판을 치면서 난 외화에선 멀어졌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사라진 영화엔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한국 영화가 대단히 맘에 들었던 것도 아니다. 지금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오리지날 드라마 등등도 점점 도를 넘치며 파국으로 들어선 것이 보인다. 점점 더 자극적이고, 점점 더 공상적이고, 점점 더 비현실적이며 인생의 본질에 대한 인간들의 갈망, 구원, 혹은 적나라한 비극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다가 그 목적을 잃어가면서 오히려 그 반대로 치닫는 작품들의

최후는 뻔하니까.

 

달콤한 인생의 정서적인 비극성이나, 느와르 특유의 절망감과 허무함의 극치를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는

이후론 없다. 피...피가 난무한다. 인간의 사악함과 그 사악함을 마음껏 표출하게 만드는 물질,즉 무한대의 부가 뒤에 있는

하지만 그 무한대의 부는 필연적으로 온갖 범죄의 산물이고, 그 결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난 영화에서, 그리고 이른바 장르물이 판치는 지루한 드라마에서도 눈을 돌렸고 등도 돌렸다.

 

그 와중에 그래도 몇몇 작품이 내겐 위로처럼, 추억처럼 최후의 보루처럼 소중하게 남아 있다. 

'미스터 션사인' '나의 아저씨' '손더 게스트' 등등이 그것이다.

거기에 최근에 끝난 나의 해방일지가 가세한다.

 

나의 해방일지를 처음 볼 땐 가슴이 아파서 끝날 즈음엔 아릴 지경, 병이 날 지경이었다.

난 나를 아프게 하는 드라마를 싫어한다. 늘 우울증에 시달리기 때문에 굳이 찾아서 아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우글대는 '나의 아저씨'나 '나의 해방일지'같은 드라마를 굳이 아파하면서 볼 정도라면

그 작품이 대단하거나, 그 작가가 대단하거나, 그 배우들이 대단하거나...

 

같은 작가의 작품임에도 후자는 보다 더 비극적이고 부정적 정서가 강해진 느낌이다. 적극적으로 구원을 찾아서

무의미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하는지, 내던질 수도 없고,그렇다고 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무겁고 짜증나는 인생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대상은 젊은이들이다.

그렇다고 나이든 사람들이 뭔가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모범을 보여주는가?

 

아니다, 한국의 나이든 세대는 아무런 철학도 아무런 믿음도 생각도 없다.

그들은 정신이나 영혼을 육신에 바친 것처럼 자신의 육신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그래서 그 육신이 붕괴해야 항복한다.

 

눈뜨면 잠 들 때까지 잔인한 햇볓 속에서 밭일을 하고, 자기뿐 아니라 일주일 내내 직장에서 고생한 자식들까지

노동으로 끌어들인다.

 

그게 전부이다. 다른 의미로 불쌍한 사람들이지만, 자식 세대처럼 욕망하거나 구원받고 싶어하지 않아서

더더욱 비참하다.

 

나의 아저씨에는 삼형제가, 해방일지에는 삼남매가 나오는데

삼형제가 비현실적으로 가깝고 서로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에 비해 해방의 삼남매는 훨씬 현실적이다.

 

사실 난 나의 아저씨에서 삼형제의 서사가 정말 재밌었다.

박동훈도 삼형제랑 같이 있을 때 훨씬 재밌었다.

'나의 해방일지'도 그러하다.

 

삼 남매의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 평소엔 소 닭보듯이 하거나 개싸움을 하거나 무관심하지만, 사건이 터지면

뭉쳐서 세상과 맞선다.

 

사실, 난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지만, 경기도민이라해서, 지방 출신이라해서 그 사람들이 다르게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주인공들이 경기도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그것으로 인한 고충을 토로할 때, 출퇴근 시간에 인생의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다른 것은 오히려 부러웠다. 형제보다 더 형제 같은 친구들이 있고, 그들과 어울려 바베큐를 해먹을 공간이 있고, 계절을 보다 명확하게 느낄 수 있으며, 구씨의 말대로, 보다 야성적이고 본능적인 인간 본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것도 이제 내가 나이 들어서 사실상, 어느 순간부터는 출퇴근과는 담을 쌓고 버스나 지하철도 가능하면 타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는 공간에 한해서만 움직거리며, 나의 활동 반경은 내가 몇 십 년 살고 있는 이 곳, 내 젊음을 보냈고 내 중년을 보내는 이 곳을 언젠가부턴 전혀 벗어나지 않은 채 오히려 경기도민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이제 난, 연탄이나 난로를 때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라면맛이  변한 것이 아니라, 가스불 탓이며,

밥이 맛없는 게 아니라 전기밥통 탓이며, 생선이나 고기를 구워도 옛날처럼 맛있지 않은 이유도

직화가 아니기 떄문이다.

 

신기한 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십 년 정도 되었는데 요즘은 직화요리가 유행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사람들도 잃어버린 맛의 원인이 바로 연료, 즉 근본적인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 21세기를 살고 있는 망가지고 황막하고 메마르고 텅텅 빈 자아를 부여잡고 남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려고

기를 쓰는 많은 사람들은, 물론 나야 그런 대열에 끼어본 적도 없고 애초에 소질도 없었지만, 근본으로 돌아가야한다.

 

나의 아저씨나 나의 해방일지 같은 드라마들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그득한, 본능을 버려야한다고,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경쟁하고 남들과 같은 욕망을 품고 곁눈질하며 살아야한닫고 역설적으로 울부짖지만, 실은 그런 삶의 고단함이 인간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고 어딘가에 중독되어 자기 자신을 잊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증오감에 사무치며 망가져갈 뿐이라는 걸 보여주는 따스한 드라마였다.

 

먹고 자고 출퇴근하고 저녁엔 옹기종기 모여 쓰잘데기없는 얘기나 주고받으며 맥주를 나눠 마시는

그들이 난 그립다.

우두커니 앉아 바람과 달과 구름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처연한 구씨는 아프다.

남들처럼 살라고 외치면서, 남들처럼 사는 바람에 망가져버린 자신을 구원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린 구씨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