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
내가 좋아하는 홍콩 영화는
아비정전이다.
물론
극장 상영시엔 보지도 못했고
후에 비디오로 봤다.
그땐 비디오 대여점이 한참 성행할 때였다.
한번 보고 소장하고 싶어서
당장 주문했다.
장국영이 은퇴하면서
마지막으로 찍었던 영화 중 하나였고,
(불과 일 년후에 컴백하는 바람에 왜 은퇴했는지 이해불가하지만)
그는 그 영화로
홍콩 금상장인가 뭔가 하는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다고 들었다.
호화로운 당대 유명 배우들의 캐스팅에
장국영이 은퇴 직전에 찍은 영화라해서
잔뜩 기대를 걸었던
홍콩 영화팬들은,
그 영화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대체 저게 뭔 소리야?
그들이 기대한 게 뭔지 알 것 같다.
홍콩 느와르가 판치던 세상이니
아마 뭔가 그 비스무리한
통속적이고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홍콩식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은
왕가위라는
신예 감독의
홍콩 영화엔 어울리지도 않는
작가주의 작품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비정전을 본 게 하두 오래 전이라
나도 기억은 희미하다.
하지만
가장 기억나는 건
밤비에 끈적거리는 듯한 홍콩의 밤거리와,
흐느적거리는 음악들이다.
젖은 듯한 밤거리와
흐느적대는 음악 속에
서로 어긋나는 사람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랑에 집착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새긴다.
런닝 차림으로
거울을 보고 추던 장국영의 유명한 맘보춤과 마리아 엘레나의
조화는
자조적이면서도 자폭하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아비를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일까?
밤마다 쏟아지던 폭우들도 기억난다.
그 폭우 속에서
떠나는 아비에게 절규하던 유가령의 모습도...
시선이 비껴가듯 어딘가를 동경하듯,그러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듯
나른하게
공허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레슬리의 눈빛,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는 발없는 새같던 아비의
권태로운 폭주.
계단을 빠르게 훑어올라가며 흔들리던 스테디컴 카메라 기법이
쫓아다니는
주인공들의 상실감,
의미 없이 살인을 하고
또한 의미 없이 총에 맞아 죽어가던 장국영이
빠르게 달리는 기차 밖으로 바라보던
풍경들
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한
홍콩인들의 몸부림과 절망감이 장면마다 넘실대던,
그래서 장국영이 기어이 생모를 찾으려는 시도가
허사로 돌아간 후에
슬로우 템포로 쓸쓸하게 걷던 뒷모습과
그때 깔리던 독백, 그리고 기타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린다.
그 작품과 또다른 작품 하나를 남기고 은퇴했던
장국영은 겨우 일 년만에 컴백해서
이상한 코미디 영화 하나를 찍더니
패왕별희라는 첸 카이케 감독(맞나?)의 영화를 찍는다.
장국영 팬이었던 나는
그 영화가 개봉하기만을 눈빠지게 기다렸다가
개봉하자마자 달려가서 보았던 기억도 난다.
홍콩 영화가 한참 국내에서 열을 올리던 시절,
주윤발이나 유덕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양조위는 신예였다.
그러나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장국영은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고,
주윤발은 한단계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에 성공해서
홍콩을 벗어났으며,
양조위는
수많은 국내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난 양조위 영화는 본 게 없음을 고백한다.비정성시외엔...)
배우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참 이상한 생각이 든다.
아비정전은 원래 2부작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장국영의 죽음 이후의 1부는
이야기를 완성시키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양조위의 의미심장한 행동과 함께 막을 내린다.
하지만 흥행참패는
기어이 영화의 완성을 막았고,
그래서 아비정전은
미완성작이 되고 말았으며
흔히 말하는 저주받은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엔딩의 양조위씬만 없었다면
1부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도가 높은
수작이었다.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가끔씩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아비정전....
그 비디오 테잎은 지금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알길이 없다.
게다가 화질 좋은 영상에 길들여진 눈은
이제 비디오 테잎으론 만족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컴퓨터 시대가 낳은 또다른 벙폐?
발없는 새처럼
그래서 하염없이 날아다닐 수밖에 없는 새처럼,
힘들어도 바람 속에서만 쉴 수 있는 새처럼,
그래서
너무 지쳐서 땅에 내려앉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는 새처럼..
그렇게 지쳐서 땅에 내려앉기 직전처럼
나도 피곤하다.
혹은 나도 아비가 말했듯
처음부터 죽어 있는걸까?
나도 사랑을 모른다.
죽기 전에
나도 이젠 사랑이 뭔지 알게 되고,
보게 될 것인가?
빛바랜 색채감이
삭막하고 황폐한 인생을 반영하듯
하염없이 슬프면서도
그 슬픔조차 쉽게 드러내기 힘들었던
아비정전..
오늘은 유난히 거기에 삽입되었던 음악들이
듣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