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과 동이-사극에서 이런 깊은 애상을??
사극을 보면서 어떤 종류의 감정을 느낀다는 건 내겐 새로운 경험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병훈 피디의 사극이 내게 성공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애잔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내가 느꼈다는 점이다.
이산을 보자면,
문제의 홍국영인데,
이 홍국영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나를 열받게 하는 인물이었다.
내가 홍국영에 관련한 생생한 기록을 처음 접한 것이
'한중록'인데,
내가 처음 한중록을 읽었을 무렵,난 어렸다.
비판 능력이 매우 부족하여
저자가 내게 주입시키고자 하는 사고에 그대로 묻어가던 시절이다.
혜경궁은 긴 지면을 할애하여
홍국영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고 있다.
한중록의 저자는 정조의 어머니이고,
어머니 입장으로 본 홍국영은 천하의 죽일 넘이다.
못마땅해 죽고, 미워 죽고, 괘씸하기 그지 없는 역적 놈인 것이다.
아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고, 그녀의 말을 따르자면
사속조차 보지 못하게끔 아예 주변에 철벽을 쳐서 고립시킨
사상 유례없는 악독한 넘인 것이다.
비록 즉위 초의 3년 간이라하나,
홍국영의 꼭두각시처럼 묘사되는 정조가 다소는 한심해보였던 것도
그 무렵이다.
어린 나이라해도
정조가 조선 후의 성군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정조가
홍국영에게 농락당하는 듯한 혜경궁의 노기에 나도 감염이 되서
다소 실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드라마 이산에서 본 홍국영은 혜경궁의 눈으로 본 죽일 넘과는 좀 차이가 있다.
하지만 혜경궁이 가장 치를 떨었던
중궁전을 제치고 원빈이라 칭한 자신의 어린 누이를 후궁으로 들인 점 같은 것이
오히려 혜경궁이 앞장 서는 것으로 나오니
다소 헷갈린다.
장성한 아들에게 13살 짜리 후궁을 들이대는 것을
'저걸 언제 키워 사속을 보리오'
라고 한탄한 혜경궁이 원빈을 자청해서 들였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 무렵에 벌써 정조의 나이가 30에 가까움에도
이렇다할 후궁도 없고, 후사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달이 나 있던 혜경궁이
그렇게 어린 처자를 후궁으로 들였을 리 없고,
더더우기 자신의 친정을 적으로 삼아 제거해간 홍국영의 누이에게 우호적이었을 리도 없다.
이렇듯,
홍국영의 행적을 보면 사실상 다소 얄미운 점이 없지 않음에도
어쩐 일인지 극중에선 셰익스피어적인 비극적 인물상이다.
그리하여 그가 점점 궤도 이탈을 하면서 파멸을 향해 폭주를 시작할 땐
저런 바보, 저런 미련한 넘, 당장 눈앞의 권세가 뭐라고 평생 누릴 수 있는 힘을
과용하여 운을 재촉한단 말인가 등등의 한탄을 해가며
그럼에도 그렇게 치닫는 홍국영이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서
연민을 느끼는 눈물이 펑펑 쏟아질 지경이다.
홍국영의 몰락에 눈물 흘리는 대수와 똑같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산이 그를 잃어버리고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듯
고통스러워하는 심정에도 완전 몰입 만빵이 된다.
내가 이산에서 기억나는 건
다름 아닌
홍국영의 비극적 몰락과 죽음이었다.
홍국영의 죽음에 대해서도
혜경궁은
뉘우치지 않고 제 스스로 죽으니 더욱 괘씸하다고
오히려 화를 내는데,
여러 기록에서 보면
홧병으로 죽었다고 나온다.
역사와 기록이라는 게 참 묘한 거라
단지 사실만을 기록하기에
이면에 있는 인간의 심리와 감정은 배제하기 마련이니
실제로 홍국영이 죽음의 자리에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누가 알랴?
조선조 사대부에게 섬세한 감성이나 미묘한 심리같은 게
과연 있었을지 난 매우 의문이지만,
적어도 정조가 홍국영을 완벽하게 신뢰하고 사랑함에 이유가 있었듯
홍국영도 그렇지 않았을까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만들어준 계기도 되어 준다.
그가 홧병으로 죽었다면,
그건 그냥 사인이고 사실이지만,
이면에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주군을 원망했을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주군을 그리워한 나머지
병에 걸렸을지
누가 알랴?
어쩐지 후자일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산이 준 지나친 감상인가?
엉뚱하게도 홍국영의 비극이 이산에서 인상적이었듯,
동이 또한 그러하다.
숙종조의 대스캔들이었던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악연에 치어서
아무도 그 존재를 대단치 않게 여겼지만,
실은 그들의 싸움에 있어서
예기치 않은 변수이자, 최후의 승리자였던 숙빈최씨 스토리를 본격 담은
동이도 드라마의 질이나, 내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한 등장인물들과는
무관하게
사극을 보면서 이런 애상을 느낄 수도 있구나 싶은 긴 여운을 남겼으니,
이병훈표 사극의 매력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동이가 내게 준 야릇한 아픔이 뭔지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