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낙서

프랑소와즈 사강, 피아노, 그리고 바하 D장조 파르티타

모놀로그 2011. 12. 5. 07:08

잠버릇이란 것이 이상해서

자칫 잘못하면 한동안 고생한다.

 

언젠가부터 초저녁에 깜박 잠들었다가

정확하게 새벽 1시면 깨어난다.

 

그리곤 다시 잠들지 못한다.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컴터를 켰다 껐다, 오디오를 켰다 껐다

 

블로그에 글을 썼다가 그냥 날려보고

지난 드라마를 보다가 때려치우다보면

 

기진맥진,

아침녁에 다시 잠이 드는데

 

이건 좋지 않다.

 

난 잠을 푹 자지 않으면

종일 기운이 없어 하루를 망치는 스탈이다.

 

아침 잠이 많아서

특히나 그렇다.

 

이 빌어먹을 리듬을 바로 잡아야할텐데...

 

그런데

어째서 새벽 1시면 정확하게 깨어나는 것일까??

 

분명...

내 안에서 벨소리가 울리는게야

 

새벽 1시면 울리는 벨소리..

 

 

그래서 난 수없이 썼다 날려보낸 글들을 다시 끄적여본다.

이건 일기장에나 써야할 글이다.

 

1. 프랑소와즈 사강의 죽음

 

 

며칠 전, 갑자기 소녀 시절 즐겨 읽었던 사강의 소설들이 읽고 싶어졌다.

난 사강의 소설들을 모조리 가지고 있었다.

 

책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

어느 순간부터 난 소설이라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아니,

이른바 작가라는 사람들의 쓴 글은 모조리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도 난 이른바 독서광이었다.

그래서 내 서고엔

들쑥날쑥한 취향으로 수집한 갖가지 서적들이 꽉 들어찼는데,

 

도스토에프스키를 대표로 러시아 문호의 작품들과

프랑스 소설들

그리고 일본 소설 외에

내가 아끼는 여러 작품들이 마구 섞여 있다.

 

그러나,

책을 멀리하면서

난 그것들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사강의 소설들에 대한 향수에 불타서

한권 찾아 읽으려고

실로 오랜 만에 서고에 갔다가 깜짝 놀란다.

 

어릴 때부터 모아놓았던 내 손때가 묻은 책들이

절반 이상은 사라지고 없다.

 

그중에서도 사강의 소설들은 단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더 심한 건

대체 어찌하여 그 책들이 사라진 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 책에 손을 댈 사람은 없다.

난 책을 누구에게 빌려준 적도 없고,

가족이 그다지 많지도 않지만, 내 까다로운 성미를 아는지라

그 누구도 내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버린건가?

 

하지만 난 책을 버리진 않는다.

대체 어째서 책이 사라진거지?

 

인터넷으로 그 여자의 책을 구입하기 위해

검색하다가

 

프랑소와즈 사강이 몇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에

다시금 난 놀란다.

 

그건 마치 그 여자의 작품이 상징하는

나의 소녀 시절의 한면이 사라진 듯

그 여자의 작품들이 모조리 내 서고에서 사라진 것처럼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은

뭐 그리 대단할 것은 없다.

 

브르조와적인 연애소설들이다.

대개 비슷비슷하다.

 

재기발랄한 프랑스의 부유층 출신 여류 작가의

연애소설일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재밌다는 것이다.

 

개중엔 꽤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읽지 않아서인가

내 기억 속에서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슬픔이여, 안녕'

특별히 내가 아꼈던

'라 샤마드'

정도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그래서 갑자기 그 여자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내 서고에서 그녀의 책들이 사라지듯,

그 여자도 오래 전에 세상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그 여자의 소설을 즐겨 읽으며

친구들과 그 여자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그 여자의 작품에 대해서 수다를 떨던 시절이 사라졌듯

 

내게서 또 하나의 시절이 그렇게 사라졌다.

 

 

2. 피아노

 

난 작년에 갑자기 엄습하는 저 발작적인 변덕에 내 스스로를 맡기듯

피아노를 처분해버렸다.

 

일찌기 내 인생에서 늘 나와 함께 했고,

한시도 내 곁에서 떠나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내 생활의 기반이기도 했던

피아노를 왜 없애버리려고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 건강이 나빠진 이후로

통 피아노를 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그 덩치크고 무거운 물체가 부담스러워졌나보다.

 

그게 자리를 엄청 차지하는데다가

관리도 해줘야하는데

난 몇 년이나 그걸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작년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이제 피아노를 치지 않을 것이야!!

 

어린 시절부터

얼마 전까지 내 인생의 동반자였던 피아노는 그렇게

내게 버림받았다.

 

그리고

물론 난 지금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한다.

 

지금 같은 피아노를 사려면

처음 샀을 때보다 두배는 더 줘야한다.

 

그걸 그저 내다버리다시피 했다니

내가 미친게야!!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고,

피아노를 다시 사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마치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내 손가락은 어쩌면 다신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피아노는 커녕

자판을 치는 것도 힘들 지경이다.

 

아니,

내가 무슨 슈만인가?

 

나같은 평범한 인간에게

굳이 그런 형벌을 내릴 건 없자나??

 

하지만

설사 우찌우찌 손가락이 조금 낫는다해도

아마 피아노는 다신 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 일말의 공포를 느낀다.

 

 

3. 바하의 파르티타 D장조

 

대학 시절, 대강당에선 가끔 교수들의 연주회가 열리곤 했다.

교수들도 가끔은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여 그 결과물 비스무리한거라도

발표해야 명목을 유지할 수 있다.

 

음대 교수들의 연주회는 일종의 논문인셈이다.

교수직을 유지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난 물론 그런 연주회는 일체 들어가서 듣지 않았다.

 

그날 연주회를 하는 교수는 특히 그러했다.

아주 평범하고 별볼일 없는 피아니스트였다.

아니 음악가나 예술가라기보단

그저 멋쟁이 아줌마라고나할까??

 

음대 교수라는 타이틀은

그녀가 몸을 감싼 명품에 잘 어울린다.

 

그런데,

갑자기 난 걸음을 멈추었고,

이윽고는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앉아서 경청했다.

 

그녀는 바하 파르티타 D장조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내 일찌기 누군가의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린 적은 그때가 처음인 것 같다.

 

테크닉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음색이 기막힌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하를 그렇게 아름답게 연주하는 것은

이전이나 이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특히 그 멋쟁이 아줌마가

그런 연주를 한다는 것이 놀라왔다.

 

바하만이 지닌,

흐르는 듯한 선율이

강당을 메우고 있었다.

 

제대로 연주해야만 나오는 선율이다.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작고 맑은 냇물이 어디선가 흘러나와

어디론가 사라지듯

 

신비롭고 아련하였다.

 

그 흐르는 듯한 애잔함에 넘치는 선율을

그 여자는 어디서 가져왔을까??

 

그 어떤 유명 피아니스트도

결코 낼 수 없었던

그 흐르는 듯한 애상을

난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