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24부- 신군과 율군, 펜싱 대결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건가?'
율군은 신군과 펜싱으로 겨루고 있다.
두 사람의 첫 정면 승부이다.
율군의 입에서 나온 '내일..'
그 내일은
신군은 검찰에 소환당하는 날이고,
채경이는 출국하는 날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율군이 아무래도 허무개그 쪽으로 마음을 굳혔나보다
맥이 풀린다.
채경이가 외국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펄쩍 뛰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이제 그만 하자는 둥,
자기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둥,
난리를 치길래,
그 '무슨 짓'을 빨리 해주길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감감소식이다.
아무 짓도 안할 뿐더러,
이제 내일이면 다 끝나는 거냐고 오히려 신군에게 묻고 있다.
궁에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있는데,
물론 그건 내 이해력 부족이 문제겠지만,
그런 장면은 신기하게도 대개는 율군이 주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난 율이라는 인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나보다.
일국의 황태자로서 치욕을 앞둔 신군과,
그가 그런 치욕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율군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닥 않고 있으면서,
자기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또한 알고 있는
신군 앞에서 저런 대사를 날리고 있으니
어찌 이해하란 말인가??
'내일이면 끝나는건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율군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한
신군에겐 물론 희망이 별로 없다.
그거 뻔히 알면서 저런 질문, 저런 대사는 너무 무의미하지 않은가?
궁에서 그려진 율군이 대책없는 악역이라면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궁에선 율이란 캐릭터를 너무 여기저기 양다리를 걸쳐놔서
도무지가 순수하지가 않다.
괴로와하는 지성인도 아니요,
저돌적인 행동파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둘 다가 아닌 것도 아니다.
정말 난해(?)한 캐릭터가 아닐 수 없고
정말 깊이 없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으며
도무지가 앞뒤가 맞지 않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어지는 신군의 대사도 역시 내 관점에선 무의미하다.
'음모는 니가 꾸민 게 아니니까'
'내가 아는 이율은 뒤에서 칼을 꽂는 놈은 아니니까'
이런 대사는 그저 멋을 부리기 위한 대사 이외의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다.
차라리
신군이 한 말,
'진실은 남아 있으니까'(숨찬 듯한 신군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정확한 건진 모르겠다만)
이게 좀 낫다.
진실이 있다면 희망도 있는 것이고,
설사 율이 그걸 밝힐 용기나 의사가 없다 해도
그 진실의 힘이 신군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율군의 검은 번번히 신군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게 바로 진실의 힘일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현재의 시점에서 엄마의 치마폭에 숨어 있는 율군이 강자처럼 보이고,
소환에 당당하게 응하라고 신군의 등을 떠미는 아버지를 가진
신군이 약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율군이 오히려 신군보다 더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그는 떳떳할 수 없기에
당당하고 거짓없으니 꿀릴 것 없는 신군의 검에
밀리는 것이다.
율군이 비록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뒤에서 칼을 꽂지 않았다해도,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엔 진실을 밝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해도
그게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한
신군의 말대로
직접 꾸민 음모가 아니고,
뒤에서 꽂는 칼이 아닐지라도
결국 그는 공범일 수밖에 없다.
내 관점으로 율군의 검은 비겁하다.
그리하여
당당하고 순수한 신군의 검을 이겨낼 수가 없다.
진실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세다.
그래서 율군과의 펜싱 장면은
내겐 진실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비겁한 검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신군과의 정면 승부에서 율군이 이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신군이 율군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말.
원래 율군이었던 황태자 자리,
결코 편치 않았다는 고백이
그나마 어거지로 날 납득시킨다.
신군이 율군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군이 율군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과,
율군이 진실을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율군에게 어떤 액션을 취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신군을 위해서가 아니라
율군 자신을 위해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