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궁

궁 5부- 신군의 생일 파티

모놀로그 2011. 2. 2. 10:45

신군의 생일 파티는,

거의 한 회를 차지하다시피

긴 시간을 할애한다.

 

그저 일국의 황태자 생일 파티와,

그 자리에 모여든 중심 인물들을 산만하게 배치하여

자칫 지루한 서술 같지만,

 

그러나 신군의 생파야 말로

앞으로 중심 인물들에게 닥쳐올 갖가지 심리적 파란이 잉태되는 장소라고 해도 좋다.

 

말하자면 이후에 펼쳐질 궁의 갖가지 복선들이 여기저기 깔린다는 의미에선

매우 중요한 시퀀스이다.

 

 

따라서 지루한 듯 보이는 매 장면의 이면엔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서

그것을 찾아 읽는 맛이 쏠쏠하다.

 

사실 생파가 지루한 이유는,

주요 주체인 신군이 그 파티를 지루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날 처음으로 지루하지 않은,

자신의 나이에 맞는 세계를 살짝 들여다보고

그곳에 한발일망정 담그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희미하게나마 품게 되는 것이다.

 

 

신군과 채경은 당연히 부부동반으로

생파에 참석하는데,

 

황태자의 생파이니만큼

거의 공식 행사 수준이다.

 

황족들과,종친들, 그리고 귀족 계급의 청소년들이

초대되었다.

 

그런 종류의 파티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그러나

19세 황태자의 생일 파티에,

참석자들은 역시 청소년이지만,

황족들이며

또는 귀족계급이다.

 

그래서

그 파티를 우린 지금까지 봐온 비슷한 장면과는

또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어린 왕자님과,

공주님들이 모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연, 고상하고 조촐하며

고리타분하다.

그리고 그게 또한 신군 생파를 보는 재미이다.

상상해보면 참 재치 있는 발상 아닌가??

 

먼저 신군을 보자.

그는 혼인 초에 비해선

채경에 대한 인식이 아주 조금은 달라져 있다.

 

일상을 함께 한다는 건

생각보다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상대가 요조숙녀라

마치 황제 부부처럼 예의를 갖춰 대하고 있었다면

아마 조금도 두 사람의 관계는 진척되어 있지 않았겠지만,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수차례 두 사람은 다투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투고 화해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라는 것을 조금은 주고받아야한다.

 

식탁에서 울린 후엔

청춘의 덫을 봐줘야했고,

 

부모님 껀으로 울린 후엔

그녀의 혼잣말을 엿들어야했다.

 

그 결과

겉으로야 여전히 그녀를 무시할지라도

마음까지 그렇진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외부로까지 표출될 정도는 아니다.

 

무시하기도, 그렇다고 인정하기도 애매한 시점이다.

신군에겐 채경에 대한 감정이 혼란기에 접어 들었다.

과도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신군에겐 상당히 피곤하다.

그래서 그는 일단 무조건적으로 그녀를 방치한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을 멀찌기 밀어두고 방치하는 것과 같다.

 

효린은,

작정하고 그 파티에 참석한 것 같다.

 

눈부시게 차려입고 극적으로 등장해서 만인의 눈길을 끈 후에

황태자 앞에 나선 그녀는

마치 자신이 그 파티의 호스티스라도 되는 양

분위기에서 황태자비를 압도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애초에 자기와는 상대도 안되는 아이라고 자신하지만,

어떻든 황태자비인 건 그쪽이다.

그렇게까지 우습게 보이는 상대에게

심하게 태클을 걸 이유는 사실 없다.

혹시 효린은 겉보기보단 채경을 강하게 의식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깔아뭉개자고 작심하고 온 건가?

그런데 채경이란 아이는, 황태자도 깔아뭉개지 못하는데

효린이 그걸 할 수 있을까?

하긴 황태자는 몰라도

라이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식탁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아

그의 시중을 들기까지 한다.

 

그때 관성의 법칙에 따라

신군은 효린의 페이스에 말려든다.

아니 말려든다기보다

그 또한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거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그에겐 익숙한 것들이니까.

새롭고 낯설어서 불편한 채경이와 그녀에 대한 혼란스런 감정보단,

그래도 효린쪽이 더 편하다.

게다가 노골적으로 호스티스 역을 자처하고 나선

효린의 적극성과, 그 뒤를 밀어주는 골드 3인방에게

그는 눌리고 있다.

 

그는 뭔가와 투쟁하는 것이 귀찮은 것 같다.

 

하지만

식탁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치열하게 오가고 있으니

 

 자기는 방치하고 있는 채경을 율군이 보살펴주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것이 첫 경계경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방법을 몰라서 그냥 손을 놓고 있는 채경을,

율군은 얼마든지 내놓고 감싸줄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한 순간이다.

그때, 잔을 들었던 신군의 동작은 잠시 멈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율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것 또한 혼란스럽다.

그는 혼란이 싫다.

그래서 다시금 자신을 끌어당기는 효린에게로 돌아선다.

 

그쪽이 아직은 그에겐 편안한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편하지도 않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아니 어쩌면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그 또한 얼결에 받아들이는 신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이때의 신군은,

자신의 의사라곤 없이 그저 효린이 이끄는대로 막연하게 따라가는

어린 소년 같다.

 

그래서 그는 스파로 도망친다.

 

 

재미 있는 샘플이다.

채경의 신경은 온통 신군과 효린에게 쏠려 있고,

율군은 채경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

효린은 신군에 대한 기득권을 과시하고 있고

신군은 어정쩡한 상태로

관성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그때 율군은 채경과 같은 시선으로 신군과 효린을 본다.

즉, 내면을 보기보단,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매달린다.

 

율군 쯤 되는 아이가

보여지는 것만 보는 건 좀 이상하다.

결국 그는 모든 걸 채경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신군은 자신의 아내를 무시한 채로,

옛 여친과 머리를 맞대고 웃고 먹고 마신다.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는 채경이가 안쓰럽다.

그리고

그녀를 왕따시키는 무리에 다름 아닌 신군이 앞장서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아마 당시엔 몰랐겟지만,

그때 채경에게 느꼈을 연민이 애정으로 발전하는데 있어서

신군의 행위가 율군에겐 아주 괘씸하게 잠재의식 속에 깔렸을 것이다.

 

 

 

그날, 율군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채경이는 낙동강 오리알이었다.

 

그녀는 열등감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감도 없다.

무엇보다 효린에게 공연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 채경을 율군은 측은하게 여긴다.

 

아마,

왕따당해본 기억이 율군을 겸허하게 만들고,

채경이가 겉도는 걸 이해하게 했을 것이다.

 

그 또한 적손임에도

황실에서 퇴출당해본 쓰라린 경험이 있는 것이다.

 

남편에겐 무시당하고,

골드 3인방과 효린에겐 웃음거리가 된 채경이가 그는 안쓰럽다.

 

자신이 일국의 황태자비라는 자각도 없이

감히 자신을 조롱하는 자기보다 훨씬 신분이 낮은 무리에게

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지

채경은 인지하지 못한다.

 

아마 그날 잠재적으로

율군은 채경에게 일종의 부성애적 보호본능을 자극받았으리라.

 

효린은

비록 신군이 결혼했다하나.

그건 별 의미가 없고

여전히 신군은 자기 것이라고 만인 앞에서

과시하려한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대쉬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생파에서

신군은 이미 한쪽 발을 채경의 세계로 내딛었다.

 

그건 효린이나 율군은 모르는 깊숙한 곳에서 진행되었다.

물론 채경도 모른다.

어쩌면 신군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효린이가 이미 한쪽 발에 채경의 신발을 신고 그쪽으로 가려는 몸짓을

잠시라도 취하고 있는 신군에게 다가가서

엠피3으로 그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기고, 그것으로 그의 귀를 막아

그들만의 세계에 붙들어두려 할 때,

마음 속에 구멍이 뚫린 신군은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파티에서 신군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은 건

효린의 의기양양한 신군에 대한 소유권 주장과,

그녀의 살뜰한 시중과 더불어

아직도 넌 내꺼야!라는 듯한 갖가지 모션이 아니라,

 

자신과는 멀리 떨어진 세상에서

물장구를 치며 뛰어놀던,

채경이다.

 

그녀는 황족들의 그럴싸한 세계에선

주눅이 들어 있었을망정,

 

자신의 세계를 그 안에서나마 찾고 있다.

황족들의 세계에서조차

자신의 놀이터를 만들어 숨을 쉬고 있는 채경의 옆에는

다름 아닌 율군이 있다.

 

아니,

자기가 방치하던 채경을

그녀의 세계로 돌려보내준 건

다름 아닌 율군이다.

 

그것들만이 그에게 뚜렷하게 남았다.

 

그는 그것을 다시금 모멸과 신경질과 위압적인 언동으로

채경에게 되갚아 주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개운할까?

 

그래서인지

그는 어수선한 마음이다.

 

그리고 비로소

효린의 선물을 열어본다.

 

그가 채경의 선물보다 효린의 선물을 더 늦게 열어보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채경의 선물은 새롭고 창의적이지만,

효린의 선물은 구태의연하고 익숙하기에

그는 굳이 그걸 서둘러 열어볼 필요가 없다.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에 거기엔

다른 것이 있었다.

 

 

 

 

목걸이...

 

그리스 말로

'슬픔'이라던가?

 

아마 그 선물은

이채로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그토록 과장되게 신군에게 접근을 시도해서

자기만을 바라보도록 강권했던 효린이

다름 아닌 '슬픔'이라는 이름의 목걸이를

신군에게 내민 것은,

역시나 이제 그들의 관계는 끝났고,

미래가 없으며,

그저 관계의 연장 선상에서 관성의 법칙에 따랐을 뿐임을

보여준다.

 

 

그날 밤,

 

신군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신군뿐 아니라

채경이도 밤을 새운다.

 

효린도 율군도

뭔지 모르게

들떠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19세의 청춘들은,

 

황태자의 생일파티에서

알게 모르게

뭔가를 집어들었나보다.

 

그것의 무게가 그들을 잠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 모습들은 참 아름답다.

19세라는 나이만이 가질 수 있는

설레임과, 무한한 가능성,

그러나 그것을 가두는

이기심과 소유욕들이

슬픔이라는 이름의 목걸이처럼

그들의 목에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