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궁

궁 23부- 보고 있어도 니가 보고 싶어

모놀로그 2011. 8. 24. 21:13

 

 

 

 

 

새벽까지 조사에 시달리다가

동궁전으로 돌아온 신군은,

황태자비 거처로 발길을 옮긴다.

 

이때의 영상이 참 맘에 든다.

 

예를 들어

그냥 동궁전 현관을 통해 파빌리온에 나타난 신군이

지친듯한 모습으로 자기 침실로 들어가려다,

문득 돌아서서 채경의 방을 한참 바라본다.

이윽고 결심한 듯

그리로 방향 선회하여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침실로 걸어들어가서

침대 가까이 간다.

 

뭐 이런 그림이라면 어떨까?

 

적어도

위 그림보단 덜 멋지지 않겠는가?

 

영상미란 바로 이런 것이다!

를 보여주는 듯 하다.

 

궁의 매력은 바로 저런 수많은 여백을 남기고

보는 자와의 거리감을 적당하게 유지한

영상미가 그 절반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 속으로 들어가보면

좀 어설프다.

 

난 이 장면을 대본으로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대체로 난 대본이나 시나리오는 보지 않는 편이다.

대본이나 시나리오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 안에 뭐가 있던

최종적으로 남는 건

만들어진 작품이니까..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이해가 잘 안가는 장면은

대본을 찾아볼 때가 있다.

내가 들춰본 몇몇 장면에서 얼핏 느낀 바로

 

궁은..

대본은 솔직히 영 아니올시다였다.

 

영상미가 완성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니

말해 뭐하겠는가!

 

어찌보면, 궁은 철저하게 연출가의 작품이고,

작가가 한 일은

어떻게 하면 궁을 망칠까..하는 게 아니었나 의심스럽다면

좀 심한가?

 

아무튼지간에 저런 장면을 대본으로 어떻게 표현하겠냔 말이다.

 

대본에 의하면,

'채경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단지 그것뿐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채경...

 

이 한줄로 저런 장면을 만들어낸 건 연출가요,

그 장면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건 주지훈의 신군이다.

 

채경은 당연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야한다.

아니 신군을 기다리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어야하는 것이다.

 

조사를 받으러간 사랑하는 남편이

새벽까지 안돌아오는데

쿨쿨 자고 있다면

정말 깬다.

 

그런데

실제로 드라마에선 채경이가 자고 있단 말이다.

그리고 또 너무나 빨리, 후다닥 일어난다.

 

뭐 굳이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안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만 살포시 잠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할수도 있지만

일일히 그렇게 상상력을 동원하는 건

좀 피곤하다.

특히 이런 장면에선 말이다.

 

긴 시간을 들여서

채경의 침대로 다가가는 신군의 뒷모습만으로

참 많은 말을 해주는데,

 

침대에 파묻혀 있다가

후다닥 일어나는 채경의 행동은

여전히 경박함이 묻어나서

그 멋들어진 영상미와

느릿한 화면의 여백에 초를 쳐준다.

 

아무튼

이 장면의 핵심은

 

'보고 있어도 니가 보고 싶어'

라는 닭살 돋는 멘트를,

 

신군이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을 다하여

입밖으로 내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댓가로

 

'참 잘했어요'

라는 도장을 채경에게 받는다.

 

생각해보면,

저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궁을 들었다놨다하면서 온갖 깽판을 부린 채경도 대단하고,

 

저 한 마디를 못해서

하마터면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놓칠 뻔한 신군도 대단하다.

 

또한

저 한 마디 신군의 입으로 기어이 말하게하는 것에 성공한 댓가로

폐비 내지는 유배라니

참 어이상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궁은 상식에서 무지하게 벗어난

참 희한한 드라마이며,

그러나..

 

또한 이제는 그 모든 황당함이

나에겐 그대로 궁의 매력이요

궁에 대한 그리움이요,

궁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다.

 

무엇보다 저 속엔 주지훈의 신군이 있다.

시간이 오래 흐른 지금,

내겐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더더우기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나의 신군' 이

 

궁에 대해서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멘트이고보면,

 

난 신군의 저 한 마디가

마치 이젠 궁의 모든 것,

하다못해 나를 무지하게 열받게했던 것마저

그리워하는 나에게 던져주는

위로의 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