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마왕

마왕 19부- 정태성의 울먹임

모놀로그 2011. 7. 25. 22:20

이제 승하를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에서 두번째 인물은

사무장이다.


모두 그를 사랑하고 아끼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지만,
너무 늦었다.
그가 필요로 할 땐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그들이
이제 와서 그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것이 승하에게 어떤 고통인가에 다시 한번 무심한 그들이다.
그들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승하에게 위로 내지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
승하를 납작하게 짓누르고 있다.

그들은 승하로 하여금 그들의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추악함을 돌아보게 만들고,
그럼에도 그 추악함의 끝을 향해 가는 걸음을 멈출 수 없는 그를
고단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압권으로 생각하는 장면은
오수와의 만남과 사무장과의 대화이다.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다시금 오만한 심판자의 가면을 쓰고
짐짓 여유를 부려보지만,

너를 보면 내가 보인다는 오수의 말은,
주변에 그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오히려 점점 더 고립되어가는 승하에겐
차라리 그들의
섣부른 애정보단 나을지도 모르겠다.

승하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외치는 메아리조차 없는
공허한 울림이 아니라,

자기와 똑같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절대 고독이니까.
그리고 자기와 점점 동등해져가는 오수를 보면서,
평행선을 달리던 그들이 점차로
한 곳을 향해 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겪은 그 고통을 똑같이 겪으면서
점차 자신과 닮아가는 오수를 보는 것도
이젠 고통스럽다.
멈출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가속도가 붙어서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정하게 돌아가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종착역을 향해서 달리고 있다.
 

 


 

 


모든 사실을 알게된 사무장과의 대면은
나를 가장 울컥하게 만든 장면이다.

사무장은, 정태성에겐 말하자면

해인과 비슷한 의미이다.

 

자기 가족이 결백하다는 걸 믿어준 유일한 인물이다.

해인이야 초능력을 빌어 사건 현장을 봤다지만,

 

그 황당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믿어주고

따라서 태훈의 결백을 믿어주었으며,

결국 강의원에게 유리하게 판결이 나자

형사직까지 때려치운 강직한 인물인 것이다.

 

어쩌면 승하에겐

세상에서 가장 기대고 싶은 사람일 수 있으며,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일수도 있다.

 

그런 사무장이 드디어

모든 걸 알았다.

 

지칠대로 지친 승하는

이제 그 사실을 고요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의 진폭은

그때와는 좀 다르다.

 

한 마디로 서러움이 치솟는다.

그리고 그것은 29세 변호사 오승하의

서러움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16세 소년 정태성의 서러움이다.



아주 미묘하게 흔들리는 표정과
눈가에 스미는 눈물,
서러움에 가득찬 눈빛,
승하는 어쩔 수 없이 16세의 소년으로 돌아가서
설움에 울먹인다.

그것은 어쩌면 사무장 앞에서만 보일 수 있는 표정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때까지 그가 그 어떤 사람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표정인 것은 확실하다.

 

승하에 대해서

해인은 아파하고,

승희는 애처로와하며

오수는 애증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순수하게 미안해하는 건

사무장 뿐이다.

 

어쩌면 정태성에게는 가장 무관한 사람일수도 있는데,

너무나 큰 비극을 당한 어린애를 방치한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순수하게 미안함을 품고 사과하고 있다.

사건 담당 형사로서가 아니라,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른으로서

한 소년의 비극을 방치한 책임을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사태에서 정태성은 철저하게 잊혀지고 무시된 존재였지만,
그 무서운 사건 속에서 분명히 살아서 생지옥을 고스란히
맛보아야했던 어린 소년을 기억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사무장의 설득 자체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제 와선 무의미할지라도
그는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자책하고 있다.

승하는
그런 사무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16세 소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듯 미묘하게
승하 속에 어른대는 태성의 16세 모습을,
그 서러움과 원통함과 외로움과 절대고독으로
허덕이는 소년의 모습을
내 눈에 분명히 보이게끔 해준 주지훈의
그 순간의 연기에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