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19부- 거짓된 사람들
승하와 오수가 다시금 만난다.
이 장면은 그들의 그때까지와의 만남과는 좀 다르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그러하다.
오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승하의 심장을 찌르고 뒤흔든다.
왜냐면,
그건 승하가 오수에게 하고 싶은 말,
혹은, 당시의 승하의 카오스의 핵심이지만,
동시에 승하가 기를 쓰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의 진심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용서하고 싶은데, 그때마다 죽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당신을 용서하고 싶은데 그때마다 죽은 가족들이 보입니다)
당신을 미워하고 싶은데, 그때마다 태훈이와, 당신 어머니가 보입니다.
(당신을 미워하고 싶은데 그때마다 당신의 친구들과 가족들, 그리고
이제 곧 당신이 도달하게 될 무서운 진실과 마주할 당신이 보입니다)
'당신을 보면 내가 보입니다'
'더이상 물러설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내가 당신에게 보입니다'
'다들 나에게 멈추라고, 터널에서 나오라고 하지만
내겐 물러설 곳도 돌아갈 곳도 없기에 터널에서 나와도 갈 곳이 없습니다'
오수는 드디어
승하가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던 그 지점 언저리까지 온 것이다.
심하게 흔들린 승하는 그러나 허세를 부려본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러나, 정말 두려워하고 있는 건
내겐 승하로 보인다.
물론 오수도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런 점에서 승하 또한 오수가 서 있는 지점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거의 좁혀졌다.
승하가 오수이고,
오수가 승하가 되어가고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배후조종자를 잡겠다는 의지는 사라지고
이제 진실을 찾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군요"
그런데, 왜 내겐 이 말이
'당신들을 심판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제 당신이 진실을 찾게되는 그 순간이
왜 이리 두려운걸까요?'
라는 뜻으로 들리는지 모르겠다.
다시 오수가 말한다.
'난 당신을 잡을 겁니다.
다만, 당신을 잡는 것이 이젠
기쁘지 않을 뿐입니다.'
'난 당신이 오디푸스의 의무를 다하게 되길 바랍니다.
다만, 당신이 그 의무를 다하는 순간
당신이 고통을 겪게된다해도
그것이 별로 기쁠 것 같지 않습니다'
오수와 승하의,
어쩌면 파국을 앞둔 마지막 만남이라고 해도 좋을
이 장면은
정말 처연하다못해 숙연하기까지 하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들이
전부 거꾸로 상대에게도 해당되는
진실이라는 것도 장관이다.
승하가 그토록 원했던 지점에 오수가 왔는데
승하는 이제 하나도 기쁘지 않을 뿐더러
가능하면 오수가 오지 못하도록
막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어둠 속의 창살 안에 갇혀버린
승하는 고백한다.
'멈출 수가 없어..이젠 멈출 수가 없어..'
내겐 그의 독백이,
오수로 하여금 자기가 이미 경험한 지옥을 맛보게 하는 걸
막고 싶다는 뜻으로 들린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는 것이
자기가 일찌기 당했던 그 고통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스톱 워치를 누르고 싶어하는 걸로 보인다.
이때 흐르는 음악은
'거짓된 사람들'
이다.
이 장면에서
'거짓된 사람들'
이 흐르는 것도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난 승하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에
주목한다.
우린 오로지 진실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다.
승하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인간이란 수많은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자신을 속이고 있지만,
그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삶은 모든 껍데기를 벗고
알맹이를 드러내어
진실이라는 맨살을 노출시킨다.
그러나,
그때가 생명의. 혹은 삶의 종결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진실만을,
오로지 진실만을 가지고 이 세상과 대결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라면
그건 불가능하다.
피투성이가 되어야만 가능하기에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오수가 점점 거짓을 벗어던지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승하는
아마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거짓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건
상관없다.
타인도 내게 거짓된 사람일테니까.
더 무서운 건
바로 자기 자신에게
더이상 거짓된 사람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바로 그런 순간을 향해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숨이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