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18부- 승하의 거짓말
'난 희망같은 거 믿지 않습니다.'
사실만을 말한다던 오승하의 거짓말이다.
그는 희망같은 거 믿고 싶어졌다.
그는 희망같은 걸 믿지 않는 게 아니라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버렸음을 해인을 통해서 깨우친다.
참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그에게 빛을 주던 해인으로 인하여
그는 갑자기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해인에게 거짓말을 한다.
희망같은 거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다음 말에서
알 수가 있다.
'이미 걸어온 길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지기엔 너무 늦어버렸다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해인이 자신의 본색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어쨌거나
그를 오히려 더욱 더 깊은 외로움으로 몰아넣었으니
그에겐 참으로 잔인한 아픔이다.
그는 마치 해인의 남자 친구처럼 자기도 모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데이트를 한 이후,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가 연락이 없다.
직장에도 안나온다.
몸이 아프단다.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집에도 없다.
어쩐지 심상치가 않다.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성당으로 달려간다.
여기까지의 그는 정상적인 남자들이 하는 코스를 그대로 밟았다.
그러나
막상 그녀를 찾아내자,
거기서부터 조금 길이 달라진다.
'당신이 걱정되서 죽을 뻔 했자나요'
라고 말할 뻔 했다.
그러나 '오승하'는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고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당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을 꿀꺽 삼키고
어머니 핑게를 댄다.
'어머니가 걱정하시자나요'
그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해인의 말은 그대로 찬물이 머리 끝에서부터 쏟아부어져서
발치로 떨어지는 형국이다.
그는 너무나 수치스럽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남친 내지 연인같은 마음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는데,
정작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자기를 그토록 행복하게 해주었던 데이트의 의미를 깨닫는다.
자기도 모르게 희망을 갖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니 그게 희망인지도 모른 채
젖어들어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버린지 오래인데
그것도 잊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해인은 그를 단숨에
그의 현실로 돌려보낸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그녀의 말은
오히려
승하로 하여금 자기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며
뭘 해야하며
뭐가 남았는지 깨닫게 해준 것이다.
봄날는 끝났다.
그는 성냥불에 추위를 녹이다가
그 나른함에 취해서 꿈을 꾸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버렸고,
희망도 없는데
그런 자기에게 사랑이 얼마나 사치인가를
해인은 알려준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를 세상과 연결시켜주었던 마지막 줄을 그는 그렇게 놓아버렸다.
놓고 싶지 않지만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
정태성의 밧줄이다.
해인이 자신이 정태성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는 완전히 고독해지고 만다는 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래서 정태성은 어린아이처럼 벽에 기대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는 정말 혼자 남고 말았다.
주변에 그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는 점점 더 외로와지는 것이다.
외로움이 뭔지 몰랐는데
이젠 그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