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18부- 노을과 그네
승하와 해인의 데이트씬은,
마치 유기농형의 농장에서처럼
파스텔톤에 동화 같은 느낌의,
이상할 정도로 해맑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영상미를 추구한다.
굳이 말하자면
이번 데이트는,
소나기씬과는 달리
의도적이고 본격적이며 정녕 두 남녀의 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데이트는 정말 유아적이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그네를 탄다.
기껏
슬그머니 해인의 손을 잡는 정도가
승하가 하는 적극적인 행동의 전부이다.
성숙한 두 남녀의 데이트라고 보기엔
지나칠 정도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들의.아니 정태성의 세상적 관점으론 불가능한 관계, 혹은 사랑이
더욱 애틋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들이 온전하지 못했던, 아니 온전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혹은 사춘기 시절의 부족한 정서를 채워주고 있다.
사춘기 시절에 상처투성이로 세상에서 사라져야했던 정태성과,
자신이 가진 초능력으로 인해
대인관계가 온전하거나, 남자 친구를 사귀며
남들처럼 보내지 못했을 해인은
이제 그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나란히 서서 그들이 어깨 위로 실리는 노을과 함께
이상할 정도로 쓸쓸하고 적막하게 막을 내린다.
그들에겐 허용되지 않은 아주 짧은 행복,
그들이 빼앗겼던 것을 잠깐 되돌려받지만
그들에게 부족했던 시간을 모두 채우고
황혼까지 함께 하는 것으로 그 생명을 다했다는 듯이
사라져가는 노을은 아쉬워서 물가에서 어른거리고,
그들은 지는 해와 함께 사라지는
그 시간을 배웅하는 것 같다.
승하는 시선을 돌려 해인을 바라본다.
그는 마치 자신의 눈안에 그녀를 새겨두려는 듯
하염없이 바라본다.
정태성의 덧없고, 쓸쓸하고, 무의미까지 했던 인생에서
어쩌면 한 남자로서 가장 행복했을 그 시간을
자신의 뇌리에 새겨두려는 것처럼..
그래서
그들의 짧은 데이트는
그 아름다운 화면과
해사한 모습들,
동화적인 색채감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시리다.
그네가 멀찌기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을 기다리는 슬픈 종말을 예견하고 미리 아파하듯,
저녁 바람에 조용히
흔들거리는 낡은 그네가 오히려 그 데이트 속에 담긴
무서운 진실과 슬픔을 알고 있는 듯,
그 데이트 이면에 흐르는
쓸쓸하고 황량하고 무상한 진실들을 자신은 알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아프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승하의 남자로서의 행복감보다,
이미 모든 걸 알아버린
해인의 아픔이
낡은 그네에 실려서
어둠 속에서 애잔하게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화사한 햇살 속에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서
흔들거리며 미소를 주고 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 짧았고,
그대신 밤은 길다.
어둠이 깊어가는 스산한 그네의 빈자리에선
그들이 주고받았던 미소가,
승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그 해맑고 아름다운 미소가
언제까지나
추억으로 남아서
그렇게 바람 속에서 흔들릴 때마다
그날 일을 속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