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18부- 해인, 정태성의 손을 잡다
해인은 유기농형을 찾아가서 마침내
정태성=오승하였음을 확인한다.
세상에서 완전히 말살했다고 믿었지만
정태성은 유기농형과의 사진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을 완전히 죽이는 건
역시 불가능한 일인가보다.
그토록 용의주도하게,
하다못해 생활기록부에서까지 손을 뻗쳐서
정태성의 실재를 소멸하려고
기를 썼지만,
하필 정태성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기농형에게 자신의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태성 자신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샅샅히 없앨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 관계 속에서 그 인물은
역시나 그 실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나보다.
또한 아무리 오승하로 살려고 기를 써도
그는 역시 정태성이다.
오승하라고 믿고 있는 유기농형의 사진 속에
버젓하게 정태성의 얼굴이 찍혀 있으니 말이다.
오승하가 정태성이었음을 알게 된 해인은
그 순간부터 더이상 동화 속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갑자기 가혹한 현실로 내동댕이쳐진다.
그래선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현실감이 느껴진다.
그녀에게 어떤 종류의 표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통 얼굴을 적시는 '마르지않는 눈물'로
표현된다.
그녀도 오승하 못지 않게 어쩐지 실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나이에 걸맞지 않는 이상한 초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승하와의 관계는 겉돌기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외에도,
오승하는 해인에겐 참 어렵고 힘든 인물이었다.
마음이 끌리지만,
다가가기 힘들다.
상대도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어느 선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적인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관계에 진전이 없다.
관계는 진전이 없는데,
감정은 깊어간다.
그 깊어가는 감정만큼 그는 다가오지 않는다.
조금 다가오는가 싶으면 멀어져간다.
그럼에도 해인은 그가 친숙하고 낯설지가 않다.
해인이 승하에게 처음 했던 말이
'우리 만난 적 없나요?'
였을 정도이다.
이름 모를 소년이 어느날 손에 쥐어준 우산의 기억과
돌아서서 멀어져가던 처량한 뒷모습의 기억이란
어린 소녀에겐 예사로운 건 아니다.
그러고보면
두 사람 사이의 역사는 꽤 길고
그 인연은 깊다.
그건 모두 잠재되어 있지만,
그러나 승하에겐 깨어 있는 사실이다.
그 괴리감들이 그동안
해인을 혼란케 하였다.
눈 앞에 있는 오승하와,
그가 주는 감정의 깊이와
그럼에도 진전이 없는 관계의 수수께끼는
한꺼번에 풀렸다.
그는 정태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서관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서 있던 승하가 돌아섰을 때,
뒤에 서 있던 해인은 그에게 웃음을 던진다.
그것은 눈물같은 웃음이다.
그것은 흔히 너무나 아프고 아파서 수많은 눈물을 뿜어낸 후에
더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것 같은데도
저절로 흘러나오는
정말 깊은 눈물이다.
해인의 심정이 어떨지는 우리의 상상의 영역이지만,
우리는 해인의 심정을 속속들이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정태성이었다.
어느날 가족을 모두 잃고 원한에 사무쳐서 홀로 멀리 떠나야했던
어린 소년이었다.
떠나기 직전에 그래도 자기에게 찾아와서
고맙다는 말은 남기고 갔던 문제의 그 소년,
아무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그 소년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해인에게만 모습을 나타냈던 그 소년이었다.
도서관을 바라보고 서 있는 뒷모습에서
해인은 어린 시절에 이미 봤던 그 무거운 짐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동안, 그의 겉포장에 가려져서 미처 보지 못했던
정태성의 외로움을 보았을 것이다.
간밤에 자기에게 찾아와서
허물어지다시피 매달리며 결사적으로 끌어안던
그 절망적인 고독의 내막도 알았을 것이다.
승하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볼 수 있다.
해인의 눈빛에서 미칠듯한 연민과 아픔이 사랑으로 승화되어가는 표정을 말이다.
아니 잠재되어 있던 사랑이, 이제 이해와 연민으로 인해
갑자기 깊어가는 표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가 승하에게 웃어줄 때,
그 웃음은 빛나는 햇빛 속에서 한 방울 눈물로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녀는 이제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승하의 손을 잡는다.
오승하는 두렵고 멀고 어려운 존재지만,
정태성은 그렇지 않다.
그는 춥고 외롭고 아프다.
해인은 그런 정태성의 손을 잡아
따스한 햇빛 속으로, 봄바람 속으로, 한가롭고 가벼운 봄날의 따사로운 길로
이끈다.
그리고 정태성도
그 순간만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서
처음 가보는 길로 들어선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데,
그때 난 이상하게
그 두 사람이 걷는 것이 아니라
둥둥 떠가는 것처럼 여겨진다.
마치 구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