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꽃이 사라진 봄
라일락은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꽃이다.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꽃에 별로 관심이 없다.
흔히 드라마에 나오듯
꽃집에 들어가서 꽃향기를 맡으며 눈을 지그시 감진 않는다해도,
대다수의 사람들, 혹은 여자들이 그러하듯
꽃을 좋아하거나,
그리하여 꽃꽂이를 하거나
어느 바람부는 날, 혹은 비가 오는 날
꽃집에 들러
꽃을 한 다발 사드는 멋진 면도 없다.
그런 내가 받은 인상적인 두 다발의 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른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에게 꽃선물을 받았을 때이다.
비가 오는 봄밤,
누군가 창문을 두드려서 열어보니
그는 내게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비에 젖은 라일락 꽃다발이었다.
비싼 돈을 주고 멋지게 포장된 예술적인 꽃다발이 아니라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 꽃을 무차별적으로
꺽어서 내게 가져온 것이다.
비가 오는 밤이라 라일락은 젖어 있었는데,
그 바람에 그 향기가 더욱 짙었다.
그리고,
두번째가,
내가 처음 작업실을 만들었을 때
친구가 가져온 안개꽃 다발이다.
그건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엄청나게 큰 꽃다발이었는데,
안개꽃은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다발로 보니 정말 예술이었다.
그냥 제자리에 놓아두어야 빛나는 꽃이 있다면,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야 더욱 아름다운 꽃이 있다.
전자가 라일락이라면
후자는 안개꽃이 아닐까..
친구에게 받은 그 안개꽃다발은
거의 집안을 가득 메울 정도라
난 커다란 화병에 꽂아두고
두고두고 나의 보물 1호로 삼고 감상했다.
하지만,
안개꽃에 향기가 있나?
이상하게 그건 기억이 안난다.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의 첫 남친이 선물했던 라일락 꽃 이후로,
난 라일락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고혹적인 향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라일락 향은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다.
온갖 가수들이 라일락향기를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
찬양했다.
라일락향은 고혹적이고 화려하지만
그러나 뭔지 모르게 사람을 사색적으로, 그리고 쓸쓸하게 하나보다.
그러나
라일락 향기엔 또한 청춘의 향취가 풍기나보다.
내 첫 남친이 불쑥 내밀었던 비에 젖은 라일락꽃다발처럼,
라일락은 노련하고 원숙하며 부티나는 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 부티나는 재벌급들이 맘에 둔 여자에게 선물하는 꽃이 아니란 말이다.
정말 라일락은
가진 것 없는 청춘들이 자신의 마음을 담아
꺽어서 불쑥 내미는 것에 어울리는 젊음이 있는 꽃이다.
그래서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6월,
나른하고 풍만하게 자태를 뽐내는 장미와는 달리
초봄에 잠시 피었다가
너무나 짧게 스러져간다.
하지만,
일찌기 내 첫 남친이 라일락을 선물한 이래,
난 매해마다 그 향기를 맡아야
봄이구나..생각하게 되었다.
밤길을 걷다가 문득,
낯익은 향기와, 그와 연관된 어떤 기억들이 나를 멈춰서게 할 때
머리를 치켜들면 바로 그 위에 라일락이 화려하게 피어있고
거기서 내 인생의 향기가 뿜어져나온다.
그런데,
작년에 라일락이 피지 않았다.
내겐 정말 충격적인 봄이었다.
라일락이 피지 않다니..
우리집은 물론이고,
주변의 집집마다 담장을 넘어서 땅까지 드리워졌던
라일락 나무에 피었던 풍만한 꽃다발과
거기서 풍겨나오는 청춘과 그리움과 추억의 향기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가 5월도 막을 내릴무렵,
기어이 꽃을 피우려고 안간힘을 쓰긴 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세상에 나오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던가
라일락은 끝내 향기를 피우지 못했다.
다시 한 해가 갔다.
난 올해는....
하고 기대했다.
작년엔 기후가 워낙에 이상했다지 않은가!
올해는 아니겠지?
올해는 그 향기를 맡을 수 있겠지.
이 재미도 없는 세상
봄에 잠깐 만나는 나의 추억마저 사라져버린 건 아니겠지.
그런데,
올해도 역시나 라일락은 피지 않았다.
내가 슬퍼하자 엄마는
라일락이 이제야 피기 시작하고 있다고 위로해주시지만
난 울부짖는다.
하지만
엄마!
라일락은 5월이 아니라
4월에 피는 거야!
라일락은 뒤늦게 피는게 아니라
그대로 사라질 수 없어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거야
작년에도 그랬어
마치,
흉년을 맞아 굶주려서 길바닥에 쓰러진 아이 엄마처럼..
아이에게 젖을 먹여야하는데
더이상 젖이 나오질 않는 엄마처럼..
라일락은 어떻게든 이땅에서 자기 본분을 다해보려고
기를 쓰다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던거야.
그리고 올해도 그러고 있어.
4월에 피는 라일락이
5월에 핀다는 게 말이 되??
이제 꽃이 사라지고 있는 거야?
생태계가 그토록 파괴되고 있는 거야??
2년 연속으로 라일락이 없는 4월이 나를 좀 무섭게 한다.
더이상 무서울 게 없다고 늘 스스로 타이르는데,
그래도 내가 별 관심도 없던 꽃이 제대로 피지 못하는 세상은
날 좀 두렵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