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궁

궁 21부- 율군의 황태자비 연모 고백의 허허실실

모놀로그 2011. 5. 5. 14:12

'비궁마마를 몹시 연모하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가 드디어 율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 한 마디에 궁팬들은, 전부 다 그랬는진 모르지만,

적어도 일부는 환호했다.

 

이 부분을 가지고 쓴 논문까지 봤다.

미안하지만 조금 웃겠다.

 

내가 보기에

 

율군 입에서 저 한 마디가 나오는 순간을 위해서

궁과 채경이는 그동안 온갖 바보짓을 해 왔기 때문이다.

 

즉,

율군이 자기의 사랑을 황실에 대고 선언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채경이는

이혼발언이니, 석고대죄니, 생고생에 생바보짓을 해야했고,

아니 애초에 신군과의 별 이유도 없는 갈등을 빚으며

궁이 싫다고 갑자기 생난리부루스를 춰대는가하면,

황색 언론에 드러나서 불명예스럽게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으로

궁을 온통 시끄럽게 만들어야 했다.

 

이쯤 되면,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대방송 이혼 발언이니, 난데없는 석고대죄니 하는 것들의

수수께끼가 저 순간에 풀린 셈이다.

 

 

그렇다. 율군이 황실에 대고 선언한 저 말이야말로

이혼 발언과, 석고대죄의 이유인 것이다.

저 한마디를 끌어내기위해서

참으로 머니먼 길을 돌아오면서

갖가지 생쇼를 벌인 것이다. 

 

 

율군이 드디어 약속대로 법도를 깨뜨리고

자신의 사랑을 만천하에 고하는 순간은 매우 극적이긴하다.

 

하지만

저 짧은 극적인 순간을 위해서

너무 많은 희생을 치루었고,

그로 인해 주요 캐릭터, 즉 율군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궁에선 중요한 인물인 채경이를 너무나 많이 망가뜨렸고,

그렇다고 그로 인해 얻은 것도 별로 없다.

 

그저, 저 한 순간에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드디어 율이가 한 껀 하네?

멋있당~'

 

이 정도의 반응이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그의 선언이 한 순간의 극적인 효과에 그칠 뿐

그 여파가 지속적이지 못하고,

그로 인해 율 캐릭터가 그다지 빛나지 않았다는 것,

아니 빛나긴 커녕,

저 한 마디를 해버리고나자 그를 지탱하던 에너지가 모조리

소진된 듯이 정말 보잘 것 없어지기까지 한다.

그건  이후의 궁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가 그런 발언을 한 것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채경이가 더더욱 구설수에 오르게되고

궁 안에서 버티기 힘들어진 것 밖엔.

 

만일 율군이 노리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면

그건 너무...심하다.

너무 얄팍한 사랑이다.

 

자,

 

채경이가 석고대죄하다가 돌아가시게 생겼다.

그래서 드디어 태황태후가 칼을 뽑는다.

 

태황태후는 적어도 칼을 뽑으면 과일은 깎는 인물이다.

궁에선 몇 안되는 말이 좀 되는 인물 중 하나인 것이다.

 

황족들을 모아놓고

호통을 치신다.

 

법도는 지키되, 법도의 노예는 아닌,

태황태후의 일갈은 꽤 멋있다.

 

그러나 황제는 고집스럽다.

하기야 황제가 고집을 부려야 율군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나온다.

 

그래서 마침내 율군은 채경이가 굳게 입을 다물고

털어놓지 않고 있는 그 수수께끼의 인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도 이 대목에선

 

율군,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잘 했어!

근데 진작 하지 그랬어?

왜 그토록 사랑한다는 채경이를 반쯤 죽여놓은 후에야 말하는거야?

 

라고 중얼대며,

뒤늦게라도 말해준 율군에게

감탄까진 아니래도, 채경이가 못하는 말을 해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만인의 찬탄을 끌어내고,

온갖 논문을 쓰게 했던

다음 말

 

 

'비궁마마를 몹시 연모하고 있습니다'

에선 뒤로 나가 자빠졌다.

 

허걱;;;

 

사실 얼핏 보면,

율군의 사랑고백은 비장한 그의 표정처럼

그럴 듯 하게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 고백이 가치가 있으려면

필수적인 조건이 하나 있다.

 

즉,

채경이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데

궁의 법도에 얽매여서

신군과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어거지로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그의 고백이 의미가 있고, 심금을 울리게 된다.

 

서로 사랑하는 애틋한 두 남녀가,

그러나 궁이 어거지로 맺어준 인연 때문에

멀찌기서 바라만 보며 가슴을 앓다가

더는 그 기만을 견디지 못해서

율군이 터뜨렸다면야

기립박수를 받아도 시원치않지만,

 

저 한 순간 멋있어보이는 발언은

율군을 진작에 간 안들호에서

더더욱 먼 곳으로 보내게 된다.

 

왜냐면 사랑하는 여자를 망치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선언하면,

설사 일방적인 사랑일지라도

덤태기는 채경이가 옴팡 뒤집어쓰는 것이

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고,

또한 그것이 극단적으로 지배하는

궁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관점으로는

그의 고백은 비겁하고 남자답지 못하다.

 

비록 그의 사랑이 궁에서 메인까진 아니래도

상당한 비중이 있느니만큼

보다 깊이 있고, 진정성을 지니려면

그는

 

'그날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 비궁께서 혼자 나가시길래 걱정되서

따라나갔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하고 끝내야한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한다.

 

왜냐면,

그 말은 결국 채경에게

우리 같이 죽자!

 

이런 뜻이기 때문이다.

 

신군이 그동안 두려워해온 것도 바로 그것 아닌가?

남편으로서나, 형제로서

정말 치욕스럽고 혐오스러움에도 이를 악물고 참은 이유가

 

그것이 황실에 알려질 경우

결국엔 채경이만 죽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자존심이 아작나는 아픔을 견디며

행여 주변에서 알세라

채경과 곁들어 율군까지 지켜주고,

 

율에겐

 

'너를 위해서이기도 해!'

라고 외친 것 아닌가!!

 

기껏

형수를 사랑하고 있다고 외친다고

그게 궁의 법도를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율군은 정말 순진하다.

 

법도가 깨지는 게 아니라

채경이가 깨진다.

 

남자라면 적어도 한 여자를 사랑한다면

그건 그 여자를 지켜주는 사랑이어야한다.

 

율로서는

어쩌면 그게 채경이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는 정말 혜정전을 닮아 머리가 나쁘다고밖엔 볼 수가 없다.

 

한 여자를 지켜주는 건,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저 한 마디로 인해서 궁에서 쫓겨날 것이 뻔한데,

그것도 폐비라는 불명예를 쓰게 될 것이 뻔한데,

그게 다름아닌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이라면,

채경이가 아무리 궁에서 해방되는 길이라해도

 

신군의 말대로

 

'채경이에게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니 사랑이 어떤 것인진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너의 그 잘난 사랑 때문에

채경이가 궁에서 쫓겨나!'

 

이것인 것이다.

 

그래서

난 대체 왜 율군의 저 어리석고 이기적인,

자기 자신에게나 비장한 선언을 두고

환호어린 논문이 쏟아졌는지 이해가 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