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21부- 채경이 때문에 눈물이 난다.
동궁전에서의 일막,
신군과 채경의 대화는 정말 슬프다.
신군도 슬프지만, 채경이가 더 슬프다.
우선 채경이부터 시작하자.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나온다.
너무나 우스워서 웃다가 눈물이 나올 지경이란 말이다.
첫째로,
그녀는 신군에게 화를 낸다.
잘못을 했으면 어른들에게 빌어야지, 그렇게 뛰쳐나가는 법이 어딨냐는 것이다.
그 와중에 신군에게 도덕과 윤리 교육에, 그동안 궁에서 배워온 논어와 효경에서
주워들은 몇몇 가르침을 신군에게 들이대는 것이다.
감히 부모 앞에서 할 말 못할 말을, 그것도 반항적으로 내던지다시피하고
홱 돌아나오다니 그런 법이 어딨냐는 것이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는데,
과연 신군도 어이가 없는지 할 말을 잊는다.
신군이 뭘 잘못했길래 부모 앞에서 빌어야하는걸까?
혹시 자기가 빌고 싶었는데 못빌게 해서 화가 난 걸까?
그런데 왜 빌어야하는데?
아..잘못을 했기 때문이란다.
저렇듯 도덕과 윤리 정신이 투철하고,
논어와 효경에서 익힌 여자의 도리를 잘 아는 채경이가 잘못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갖가지 이론으로 중무장한 채경이는 저런 잘못을 왜 했을까?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할 일을 왜 한걸까?
자기가 이를 악물고 천길 낭떠러지로 뛰어내는 기분으로
나름 절박하고 절실하게 외친 말이
기껏 잘못이었다니..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내가 창피할 지경이다.
그러니까.
채경이는 그냥 잘못(!!)한 것이다.
잘못이라는 말이 그녀가 한 행동에 어울리는 말일까?
게다가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잘못은 지가 해놓고
빌지 않는다고 신군에게 충고를 하니 말이다.
둘째로, 그리하여 그녀는 그 이유를 말한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건 나름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이었단다.
그리고 자신이 없었단다.
자기가 황태자비로서 잘해낼 수 있을지,
신군이 끝까지 자기를 좋아해줄지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너무나 절실하면 방송 마이크에 대고 이혼하고 싶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뭐가 그렇게 절실했다는 걸까?
신군이 말하듯, 그 순간에만 입을 다물고 있어주면
원하는대로 해주겠다고 했는데 뭐가 그렇게 절실해서
굳이 방송에 대고 그런 말을 해야했을까?
신군 말대로 그 경박한 입을 놀려서 굳이 그 순간, 그런 자리에서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면
절실한 그 무엇,
아니 황태자비로서 자신 없음과, 신군의 애정에 대한 불안이 해결되나?
그러니까 채경의 말에 의하면,바로 10초 전에 신군이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언제까지 날 사랑해줄까 불안해서 이혼 발언을 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난 채경이가 신군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안하는 줄 알고 있었다.
채경이는 늘 그렇게 말해왔다.
'날 좋아하긴 하나?'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요,
자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가식적인 황태자비를 원하는 것뿐이라는 율군의 말에
'나도 그건 알아!'
라고 분명 말했다.
그래놓고,
막상 사랑을 고백하자 감동을 하거나, 그랬구나 하긴 커녕,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다가,
금새 '이혼할래욤'
이라고 말해놓고는
방송이 끝난 후에 궁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선
그의 사랑한다는 말이 가식적인 생쇼인가 진심인가 헷갈려하던 그녀가.
왜 갑자기 실은 신군이 자길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 사랑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이혼 발언을 했다는걸까?
사랑을 믿을 수 없으면 집에 와서 따질 일이지
방송에서 이혼하는 것과 뭔 상관이란 말인가??
아..채경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내 머리도 4차원의 세계를 마구 돌아다니며 흐트러져서
달려가서 붙들어와야한다.
상식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온갖 철학과 동서양의 사상을 다 끌어다
해석하고 이해해보려고 해도
도무지가 들어맞는 이론이 없다.
차라리
'율군이 그때가 아니면 궁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을 거라고 하고,
나도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면 궁에서 알아서 내칠 것이니
가장 쉽게 해방되는 길로서
그런 말을 했다! 어쩔래!
사랑?
니 사랑 따윈 이제 필요 없어졌어'
이렇게 나온다면 적어도 말은 된다.
화가 나기도 하고, 신군이 안쓰럽기도 하겠지만
채경이가 바보처럼 보이진 않을 것이니
그녀도 어떻든 한 캐릭터로서의 타당성을 내가 인정하고 존중해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
신군은 분명 오늘만 참아주면 원하는대로 해주겠다고 애걸했다.
신군 말대로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절실하게 애걸했다.
그럼 그가 죽어도 궁에서 안내보내줄까봐 그런 것도 아니다.
도대체 왜 그랬다는 건지
나도 모르고 채경이도 모른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너무나 절실하고 니 사랑은 알지만 그 유통기한이 의심스러워서
그랬다는 것이니,
이거야 대체 글을 쓰는 것도 창피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녀가 동궁전에서 한 말 중에
저건 그래도 좀 낫다.
세번째로 한 말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내가 한 일이 황실에 그토록 폐가 되는 일인지 정말 몰랐단 마랴!!'
채경이, 유딩인가?
그런데,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게 있다.
작가가 또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것이다.
율군이 방송에서의 이혼발언으로 그녀를 살살 꼬드길 때,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그건 황실에 피해를 주는 일이며, 신군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다' 라고..
그렇게 말을 해놓고도.
신군에겐
자기가 방송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황실에 피해를 주는 일인지 전혀 몰랐다니
내가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채경이의 그런 말을 듣고 서 있는 신군이 좀 한심해보이기까지 한다.
채경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화장이며, 옷차림이 그녀가 늘어놓는 말과 어찌나 언밸런스한지
그 순간의 채경이는 정말 희극적이다.
대체 작가는 그 장면에서 채경에게 왜 그런 대사를 준 것일까?
피디는 어떻게 채경이가 그런 대사를 줄줄 외도록
내버려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선 극적이어야할 그 장면은.
채경이의 앞뒤도 안맞고, 말도 안되는 이상한 변명으로 인해서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채경이가
그토록 재미있게 보인 적도 없다.
일찌기 온갖 유머러스한 장면을 연출하던 채경이보다
훨씬 더 개그적이다.
그리고 궁 최고의 옥의 티,
아니 티가 아니라
디따 큰 흠집인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우스워서 눈물까지 나게하는 흠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