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펌글] 소나기 -궁 버전-
아마 오래 전에 궁을 보고 난 후,
마이클럽 드라마방을 전전하다가 이 글을 건진 것 같다.
당시에 재미있을 것 같아
퍼놓기만 하고 잊고 있었는데
오늘 우연히 눈에 띄여서 읽다가 뒤질뻔 했다.
궁 시절에 참 재치 있고
재미 있는 글이 많이 올라왔던 기억이 난다.
리뷰들도 수준 높고
패러디며, 기타 유머러스한 글들이 엄청 많았다.
궁갤의 어떤 남자분이 쓴
신군과 채경의 작업 기술 경기 시리즈는
그야말로 걸작 중의 걸작이어서
볼 때마다 배꼽을 잡는다.
이 글은 정말 재치 있다.
어떤 분이 쓰신걸까??
소녀는 마당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궁에서는 이런 물장난을 하지 못해 한이 맺혔다는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는 뒷산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하고 있다.
소년은 거실 소파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채준 본좌가 있어, 소녀가 비켜 주는가 했더니
함께 물장난을 하고 있다.
소녀는 소년이 소파에 앉아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날쌔게 채준 본좌의 물총 세례를 피해 도리질을 한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도리질을 한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소년은 거실 유리문을 빤히 들여다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싫었다.
분홍 스웨터에 자주색 체육복을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마당 위로는 밭이었다.
급수통을 세워놓은 밭머리를 지났다.
"저게 뭐니?"
"여기 다 물 주는 거~"
"저건 또 무슨 채소지?"
"파! 이건 무, 이건 배추, 이건 상추....."
소년은 상추를 한옴큼 꺾어왔다. 싱싱한 상추포기만을 골라 소녀에게 건넨다.
그러나 소녀는
"뭐니, 이게? 뿌리가 다 살아있잖아! 뜯으라고!"
"이 바보!"
바구니가 날아왔다.
"바보 신, 남자가 이런 것 좀 들어야지! 빨리 들어!"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나란히 소파에 걸터앉았다.
유달리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여기 라면 맛있니?"
"그럼, 라면 맛도 좋지만 계란 넣은 신라면 맛은 더 좋다."
"하나 먹어 봤으면."
그 날 밤, 소녀는 몰래 주방으로 갔다.
낮에 봐 두었던 싱크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봐 두었던 라면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라면봉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저도 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라면봉지를 움켜쥐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열 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뎠다.
그늘의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불룩한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라면봉지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손때가 묻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근동에서 제일 가는 계란 넣은 신라면을 어서 소년에게 맛보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그러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인들에게 전시회 때 날아들었던 계란을 따로 챙겨두라는 말을 못해 둔 것이었다.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이튿날, 소년 소녀가 동궁으로 돌아온 뒤,
소녀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신라면 한 봉지를 안고 나타났다.
"이만하면 될까?"
소년은 허허 웃고 나서,
"만져봐~"
소년이 등을 돌려댔다.
소녀가 순순히 등짝에 달라붙었다.
"끼호옷!"
"참, 그 날 재밌었어. 그런데 그 날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소녀가 회색 런닝 등짝을 쳐다본다. 거기엔 얼룩덜룩한 물 같은 게 들어있었다.
소년이 가만히 썩소를 떠올리며,
"그래, 이게 무슨 물 같니?"
소녀는 런닝 등짝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해냈다. 그 날, 침대에서 자면서 네가 앵긴 일이 있지? 그 때, 네 입에서 흐른 침이다."
소녀는 뺨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아 물어뜯으며, 소녀는 10kg짜리 대수머리로
총리 뒤통수를 칠 것이 아니라 소년의 머리를 찍어야했을 것을 잘못했다고 뉘우친다.
소년의 오른쪽 손등에 핏방울이 내맺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생채기에다 입술을 가져다대고 호호 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홱 몸을 일으켜 주먹을 쥐고 달려든다.
상궁과 나인들이 달려들어 둘을 떼어놓자
소년은 공연히 열쩍어, 책을 집어던지고는 마굿간으로 가, 말잔등을 한번 철썩 갈겼다.
마상격구라도 하는 척.
다음날은 소년 혼자 다락방에서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신군."
못 들은 체했다.
"신군, 이게 무슨 인형이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소녀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얼른 소녀의 손아귀로 눈을 떨구었다.
"알프레드?"
"이름도 참 곱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며
"너, 태국에 가 본 일 있니?"
"없다."
"우리, 함께 가보지 않으련? 궁에 처박혀있으니까 혼자서 심심해 못견디겠다."
"저래 뵈도 멀다."
"멀면 얼마나 멀기에? 궁밖에 있을 땐 사뭇 먼 데까지 소풍 갔었다."
소녀의 곁을 스쳐 그냥 태국으로 간다.
소녀의 시선이 따끔따끔 뒤통수에 와 꽂힌다.
쪽빛으로 한껏 갠 가을 하늘이 소년의 눈앞에서 맴을 돈다.
어지럽다. 저놈의 파파라치, 저놈의 파파라치, 저놈의 파파라치가 맴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귀국길에 소년은
"저, 어쨌든 다음엔 같이 가는 게 좋겠어...."
목걸이 상자 하나를 내준다. 소녀는 주춤한다.
"받아라. 우리 공내관이 샀다는데, 아주 비싸다."
소녀는 손을 오그려내밀며
"참, 알도 굵다!"
"저기 참숮옥돌매트가 있다. 그리 가 보자."
새 참숯옥돌매트였다. 아직 포장도 다 뜯지 않았다.
소년이 속삭이듯이,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소년이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이불과 매트 사이로 발을 집어넣었다.
그 바람에 소년이 들고 있던 책장이 구겨졌다.
그러나, 소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스파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적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너희, 예서 뭣들 하느냐?"
황후가 동궁 양관의 문 사이로 나타났다.
소녀는 참숯옥돌매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 매트에 올라타서 재질이 상하면 어쩌느냐고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다.
그런데, 머리를 풀어헤친 황후는 소녀 편을 한번 훑어보고는 그저
"비궁은 물러가 있거라. 쓰나미가 올라."
참, 태국 가십신문 한 장이 탁자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매트에서 내려오는데, 눈물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눈물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뜩선뜩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두 줄기 눈물.
소녀의 입술이 파아랗게 질렸다. 어깨를 자꾸 떨었다.
아이비클럽 교복 윗도리를 벗어 소녀의 어깨를 싸 주었다.
소녀는 쓰나미에 젖은 눈을 들어 한번 쳐다보았을 뿐,
소년이 하는 대로 기절한 척 잠자코 있었다.
분명 기절해서 쓰러졌던 소녀의 모양이 뵈지 않았다.
침대가로 달려와봐도 뵈지 않았다.
소년은 하릴없이 흰 알프레드만 만지작거리며 테라스로 나왔다.
그랬더니, 이쪽 벤치에 소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소년은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그동안 앓았다."
어쩐지 소녀의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 날, 태국 쓰나미 맞은 탓 아냐?"
소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럼 누워 있어야지."
소년은 소녀 곁에 서 있던 율은 본척만척 소녀를 양관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연못 사진은 날로 빛바래갔다.
율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보았다.
폐공장세트 입구에서 바라보는 동궁 양관은 언제나 쪽빛인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오늘밤 소녀가 교태전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 조그마한 방을 얻어 합방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율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속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한손으로는 수없이 바오밥나무 이파리를 휘어꺾고 있었다.
그 날 밤, 율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소녀가 합방한 델 가보나 어쩌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 일두..."
정보 수집차 나갔던 최국장이 언제 돌아왔는지,
"궁 분위기가 말이 아닙니다. 합방 길일을 골랐다는 궁갤러가
오늘밤 합방이 이루어지면 황태자비가 쌍둥이를 생산하게 될거라 예언했다나요,
그것때문에 벌써부터 쌍둥이 이름을 밀과 보리로 짓자는둥
난리도 아닙니다요."
남폿불 밑에서 요가를 하고 있던 어머니가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도 많을까."
"글쎄말입니다. 게다가 황태자비는 한술 더떠서
이현 황제가 옛날 합방 때 약도 변변히 못써 봐서 지금 그 후유증이 나타나는거란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습니다.
글쎄, 합방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황태자에게 꼭 보약 한 재 먹여서 한 방에 넣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