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20부-황태자, 국민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다
난 가끔 신군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신군은 채경과 율군과는 별천지에 살고 있는가?
아니다.
그 역시 19세의 고딩일 뿐이다.
단지,
처지가 그들과 다를 뿐,
실은 그들처럼 이제 막 청소년기를 벗어나려고 하는 청춘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과는 너무 다르다.
상황을 보는 눈이나, 사태를 파악하는 감각에서
어른과 애처럼 차이가 난다.
그 이유가 뭘까?
황태자로 길러지고,
그러나, 그 황태자로 사육당하는 게 너무 싫다보니
남다른 정치적 감각이 몸에 배여 있다.
5살 나이에,
갑자기 동궁전으로 홀로 내팽겨져치고,
엄마는 황후가,
아버지는 황제가 되어 버린 그 순간에,
아마 세상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굳이 정치적으로 예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신군은 자신의 세상이 뒤집어진 그 순간부터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계속 정치적인 쇼를 해야했다.
평범한 황족이었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황태자 일가의 비극으로 인해
반사이익을 얻어 황제 자리에 올랐기에
더더욱 정치적 감각이 첨예하다.
하지만,
그건 비정상적이다.
황태자로 태어나서 자라진 사람과는
애초에 마인드 자체가 틀리다.
그는 어떻게 처신해야
황실에서 시달림을 받지 않을 수 있는가를 터득했다.
또 어떻게 처신해야
교묘하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가도 터득했다.
황실이란 것이
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국민들에게 끼치는 심리적 영향까지 모조리 간파하고 있다.
또한 국민들이 황실에 환호하지만, 언제고 등을 돌려 돌을 던질 태세를
늘 취하고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런 피곤한 줄타기를 어린 나이부터 줄곧 해왔으니,
그가 보기에
율군의 사랑 타령이나,
채경의 자유 타령은 참으로 유아스럽게만 보일 것이다.
그들의 그런 듀엣 타령 덕분에
늘 중간에서 부대끼고 난처하고 전전긍긍하는 건
실은 신군이다.
그들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며
저러다 언제고 큰일 나겠구나 싶어서
조바심치는 것도 신군이다.
그래서,
채경에게 충고하고,
율군에게 충고해봤자
전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돌아오는 건 욕설과 모욕뿐이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촌,
그것도 불쾌하지만,
그러나 그보단
그것이 대외적으로 드러날 경우에 일어날 무서운 파장을
그는 알고 있다.
결국은
그것을 뒤집어 쓸 사람은
다름 아닌 채경이라는 것도 신군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율이가 원망스럽다.
그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 파장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파장을 이용해서 채경이가 혼란에 빠지게 될 때
흑기사를 자처해서 그녀를 인터셉하려는 속셈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신군의 사랑관으로 볼 때,
사랑하는 여자를 손에 넣는 방법치곤 너무나 가혹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일국의 황태자비였던
채경에게 불명예가 씌여진다면,
그것은 국가에도 치명적이며, 황실에도 누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보단 사적으로도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치를 않는다.
왜냐면 채경은 황태자비이기 이전에,
이젠 이신의 아내요, 이신이 사랑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채경의 불명예는 곧 자신의 불명예도 되는 것이고,
사랑하는 여자가 진흙탕에 구르는 걸 지켜보기만 할 남자는 없다.
그녀가 자신이나 궁을 떠나,율에게 가는 순간부터
그녀는 황색 언론의 좋은 먹이감으로 전락해서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될 것이라는 걸 신군은 알고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 혜정전도 알 것이다.
그걸 모르는 건 율과 채경 뿐이다.
채경의 아버지도 모를 것 같다.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되고,
어머니의 호소가 마음에 통했는지
그는 황태자위를 지키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처음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진심으로 황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혜정전 같은 여자가 한 나라의 국모가 되는 일은
막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율은 그렇다치고,
혜정전이 기를 쓰고 아들을 황제에 올리려는 이유가 뭘까.
결국은
자기 자신이 실권을 쥐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아들과 밀접하고, 아들을 손아귀에 쥐고 사는,
이른바 과부와 외아들의 관계이다.
어차피 율은 어머니에게 약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율이 황제가 되면
혜정전이 자연 실권을 쥐고
황실을 더럽히게 되는 것이 신군은 싫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하자마자, 그가 직면한 것이
바로 그 율과 채경의 황당하고 위험한 계획이다.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으로,
채경이의 그런 배신을 지켜본다.
아무리 채경이가 투덜대고, 냉정하게 굴고, 갖은 앙탈을 부려도
신군은 그런 것쯤은 견딜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채경이를 믿는 마음이 있다.
자신을 변하게 만든, 채경의 애정을 믿고 있다.
절대로 자신을 떠나진 않을 거라는 최후의 보루같은 믿음이다.
그게 있어야 사랑도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신군의 사랑은 타당성이 있다.
신뢰가 없이는 사랑도 없고,
신뢰가 없는 사랑은 굉장한 고통이며,
없는 편이 나은 불쾌한 감정의 낭비이다.
지금 채경이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다.
신군은 그래도 설마설마 하면서도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 일단 크게 휘청하는 순간이다.
신군과 채경은 방송국에 앉아서 대본을 보고 있다.
신군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침착하고 냉정하고 초연하다.
솔직히 좀 무섭긴하다.
옆에서 안달복달, 안절부절,
울그락불그락하는 채경의 심리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하고 태연자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어찌 무섭지 않으랴!
율군과의 통화를 저지한 후,
그는 절박하게 채경에게 애걸한다.
정 원한다면 이혼해줄테니
제발 오늘만은 가만히 있어달라고...
난 그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채경이가 끝내 자신을 믿지 못하고
떠나려고 하는 이유를 짐작하기에,
즉 자기에게도 어느 정도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기에
오늘 주어진 짧고 긴박한 순간에 그것을 단숨에 해결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면,
자신의 진심을 그녀에게 주어서 믿음을 갖게 해주는 길밖엔 없음을
신군은 알고 있다.
황태자 부부와의 대담이라는 프로에 나가서,
채경은 이혼을 선언하려고 하고,
신군은 그걸 저지하려고 한다.
만에 하나 채경이가 그 말을 참아주기만 한다면,
그는 마지막 순간에 역전승을 거둘 패를 쥐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과연 그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쓴다.
그로선 파격적으로,
국민들 앞에서 채경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랑합니다. 몹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간절하게 듣고 싶어한 그 말을,
그는 당당하게 전 국민 앞에서 하는 것으로,
그녀의 모든 불신과 갈등과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카드로 쓴 것이다.
아마,
채경이가 율과
생방에서 이혼 운운하는 걸 엿들었을 때,
그는 어떻게 하면 그걸 저지할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 방법은,
채경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름 아닌, 방송에서
서민 출신의,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황태자비를,
황태자인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만큼
빅 이벤트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하여
신군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그것을 터뜨린다.
'사랑합니다, 몹시 사랑하고 있습니다!!'
채경이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사랑의 고백을,
자신이 이혼을 선언하려던 생방에서
신군의 입으로 듣는다.
채경이는 얼마나 좋을까?
일찌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벗겨진 신발을 주워서 신겨주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었는데,
이젠 아예 언론과 매스컴에 대고
신채경을 사랑한다고~~~~
라고 외치는데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거 듣고 싶어 병이 나지 않았는가!
그런데, 정작 제일 좋아해야할 채경이가
신군을 쳐다보는 눈빛은 참으로 맹숭맹숭하고
동떨어져 있다.
아..불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