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20부- 혜정전과 율군, 그리고 채경
이혼, 내지는 궁에서 나가는 것에 대한 로망이 꿈틀대기 시작하는
채경 이브에게, 탐스러운 자유의 사과를 들이대며
유혹하는 혜정전과 율이라는 뱀의 혀가
불을 뿜는다.
채경은, 황후나 신군보단
혜정전이나 율군이 더 신뢰가 가고, 더 취향에 맞는가보다.
하기야,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자기에게 위안이 되고, 필요한 말을 들려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고, 그러면 무턱 믿게 된다.
혜정전은 신군이 채경과 이혼하는게 별로 해가 될 것이 없다.
아니 해가 되긴 커녕, 대단히 이득이 된다.
또 하나의 황태자 실덕이 늘어나서 율군을 황제로 만드는 것이
보다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당사자인 율이가 자기 계획의 복병이지만,
자기 아들만큼은 자기가 단단히 고삐를 죄고 있으며
자기 말이라면 절대로 거역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다.
여차하면 기절하거나 목을 매거나 손목을 자르면 된다.
나와 절친한 친구의 엄마는,
일찌기 아들들을 모조리 이혼시켜서 자기가 맘에 드는 여자와 재혼시켰다.
또는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게 만들었다.
그 방법은 목을 매거나, 약을 먹거나, 기절하거나
뭐 그런 협박이었다.
심약한 아들들은, 엄마의 목숨을 걸고 도박은 하지 못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무서운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혜정전이 그런 타입 같다.
집념이 대단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선
아들에게 늘 자기 목숨을 걸고 강요한다.
아무리 율이가 채경이를 좋아하고,
그녀가 이혼하면 낼름 따라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한들
혜정전이 다시금 목숨을 걸고 협박하면
결국 자기에게 굴복하리라고 믿고 있으니,
우선은 자기 아들에겐 무척 해로운 인물인 채경을 궁에서
내모는게 시급해졌다.
이혼이라는 카드는
채경이를 궁에서 내몰아 자신의 아들과 떼어놓는 것과 동시에
신군에겐 황태자로서의 자격 시비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이니
일석이조이다.
자기는 궁에서 쫓겨난 것이 분해서
십년 넘게 이를 갈았고,
다시 궁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절취부심하였고,
자기 아들을 그 숨막힌다는 황실에서도 황제 자리에 올리지 못해
안달이 나 있으면서도
효린에게 일찌기 그랬듯이
이젠 채경에게 자신의 속셈은 숨긴 채로
살갑고 한숨섞인 부드러운 마수를 뻗치는 것이다.
대개, 혜정전 같은 여자들은
상대의 아픔을 먹고 산다.
효린이가 혜정전에게 휘둘린 이유도
자신의 상실감이었다면,
이제 채경의 방황에서 빈틈을 발견하자
그곳을 파고든다.
물론, 순진한 청소년들은,
자기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혜정전에게
활짝 마음을 열게 된다.
대개,
황후같은 여자는 가까이 하기 힘들다.
법도만 내세우며
도무지가 틈이 없기 때문이다.
신군도 황후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절대로 남을 이용하거나,
남의 아픔을 파고들어 자기 잇속을 챙기려들지 않는,
이른바 진국이라고들 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까칠하고 재미도 없고
가까이하기도 힘들다.
채경은 시엄마나 남편에겐 별로 신뢰감이 없다.
외로운 궁 생활에서
자기만을 늘 걱정해주는 율군이 유일한 안식처라면
혜정전이 자기를 정말 이해하고 걱정해주는 사람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틈만 나면 쪼아대는 황후나,
사사건건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만 해대는 신군에 비하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가!!
혜정전이 속삭여대는,
자유와 꿈..
지금 채경에게 가장 아킬레스건이 되버린 그것들을
펼쳐보이며,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한편으론 궁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살짝 들려준다. 가장 채경을 혹하게 하는 말이
남편에 대한 사랑도 자유에 대한 갈망엔 별 거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니, 사랑 따윈 자유로운 삶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식으로
더더욱 채경의 깊숙한 마음을 찌른다.
채경이도 같은 갈등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궁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신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정신 사납게 오가고 있는데,
남편에 대한 사람 따윈 별 거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궁에서 살다보면 그 사랑도 식는다는 식으로 말하니
채경이는 순진한 생선이요, 혜정전은 고양이다.
거기에 율이가 나타나서
다시금 생방에서의 이혼 발언을 재촉한다.
신군을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난하는 율군의 이기심과 독선은 내가 보기에
신군보다 훨씬 고단수이다.
채경을 원하고 원하기에 갖고 싶은 건
이해한다고 쳐도
제발 신군의 마음을 제멋대로 예단하는 것만은 안해줬음 하는 소망이 있다.
율군이 채경에게 들려주는 말들을 듣고 있자면,
정말 모전자전이라는 생각이 들며 감탄하게 된다.
혜정전이 채경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망설임과 불신을 지대로
찔렀다면,
율군도 또한 같은 짓을 하고 있다.
혜정전은 궁에서의 생활을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 없음과,
궁밖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채경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통으로 건드린다.
반면에 율은,
신군에 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품고 있는 불신을 건드린다.
하지만,
대체 율이 어떻게 신군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알고
단언할 수가 있냔 말이다.
그래서, 난 그 장면에서 율이 채경에게 속삭이는 말들을 들으며
머리털이 치솟는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그냥,
채경아, 니가 너무 좋아, 나랑 같이 도망쳐!
이렇게 말하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아니, 그게 남자답다. 자기가 모르는 부분은 건드리지 말고
자기가 아는 부분만 가지고 승부를 걸란 말이다.
왜 신군의 마음을 누구보다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토록 확신을 가지고 단언하냔 말이다.
누군가 내 마음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면 얼마나 열받겠는가!
그것도 내것을 빼앗기 위해서
그런다면 얼마나 분하겠는가!
그것도 내 진심 따윈 짓밟으면서 말이다.
율군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신군이 너에게 마음을 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 닫힐 지 몰라.
신이가 원하는 건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이 아니라
황태자비일 뿐이니까'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살까 싶다는,
아직은 신군에 대한 진심을 버리지 못하는 채경의 말에 위기와 질투를 느끼자,
그는 또다시 저런 말로 채경을 흔든다.
효린이라는 카드를 써먹을 수 없게 되자,
이제 제멋대로 신군이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황태자로서의 가식적인 생활이며,
그저 그 옆에 놓인 황태자비라는 화려한 인형일 뿐이라고
아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우쒸!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니가 신군을 그렇게 잘 알아?
내가 보기에
신군은 율군을 잘 알지만,
율군은 신군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신군은 그래도 율군을 치명적인 비밀에서 보호하고 있지만
율군은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신군을 진흙발로 밟아댄다.
난 율군이 정말 저렇게 믿고 있는건지.
단지 채경을 흔들기 위해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가지만,
어떻든 정말 치사하고 악질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대의 아픔을 파고들어,
그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하는 점에서
대체 혜정전과 율군이 뭐가 다를까..
일찌기 효린이라는 카드를 들고,
효린이야말로 신군이 원하는 여자라고 그토록 입이 닳도록
채경의 귀에 대고 떠들었음에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로 드러났는데도,
이상하게 채경은 율군의 말에는 전혀 의심을 품지 않는다.
것도 참 신기한 뇌구조인데,
신군이 하는 말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지만
율군이 하는 말이야말로
내가 듣기엔 정말 가슴이 시퍼렇게 멍드는 말임에도
그 말은 수긍한다.
그렇게 신군을 모르면서
어떻게 신군을 사랑한다고 할 수가 있을까?
신군이 황태자 자리에 아무런 욕심도 없다는 것도 알고,
일찌기 황태자비로서 실수만 저지르는 자기를
늘 감싸준 신군이,
널 생각하면 보내주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죽도록 보내고 싶지 않다고 진심을 털어놓기도 하고,
백년해로하자는 소리에
황태자가 아니라도 내 곁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주옥같은 신군의 진심들은 어째서 그토록 스쳐지나가는 말들이 되었을까?
저런 말을 듣고도,
어째서 신군의 마음을 의심할까?
어째서 신군이 원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황태자비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내가 분개하는 건,
물론 제멋대로 남의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척하는
그것도 틀리게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걸 몰라서
희극적으로 보이는
율군의 비장한 단언이 아니라.
'나도 알아..'
라고 맞장구를 치는 채경이다.
아마 좀 전에
신군이
'가식적으로라도 내 곁에서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비 노릇을 해줄 사람이 필요해"
라는 말을 해서 그런가보다.
휴...
모르겠다.
저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미련없이 이혼하는 게 정답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도 취소해주길 바라는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