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20부- 신군이 하고 싶은 말VS하는 말
신군이 채경을 찾은 이유는,
아마도 이런 얘길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난 이제 황태자위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어졌어.
따라서 난 이제 널 보내줄 마음이 없어.
황태자가 이혼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난 이제야말로 황태자로서 지대로 해볼 생각이고
율이나 그의 모친에게 더이상 당하고 있을 생각이 없으니
니 도움이 필요해.
너도 이제 마음 잡고 황태자비로서 내 곁에 머물러서
비록 너로선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황태자비답게 행동해줘.
그래서 진정 마음으로부터 황태자가 되려고 결심한 나의
동반자이자, 반려자가 되어주길 바래.
비록 그러기 위해 대외적으론 가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해도
그걸 참아주기 바래.
니가 가식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난 너무 잘 알지만
난 너와 헤어질 생각이 없고,
난 오로지 너만 원하고
내 아내는 너여야하고,
따라서 니가 내 곁에서 황태자비 노릇을 해주었으면 해.
가식적인 미소나, 행동이 역겹더라도
날 위해 참고 해주지 않겠니?'
대략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새삼 그녀의 부모에게도 일침을 놓았을 것이다.
이제 신군은 더이상 채경이를 방치하지 않고,
그녀에게 필요한 교육을 자신이 시켜서라도
황태자비답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와 황태후의 사연을 알게 된 것과,
그런 황태후가 국모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짓거리를 감행하는 것,
더불어 쓸쓸한 인생을 살아온 황후인 어머니에 대한
동정과 이해
등등이 합세하여 신군은 방황을 멈추고
이제야말로 황태자로서, 그리고 황제로서 살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채경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것을 호소하고 설득하려고
채경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그 채경은 부모 앞에서
집에 가면 안되?
이딴 소릴 늘어놓고,
그녀의 부모는 맞장구를 치고 있다.
그래서 신군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고,
그로 인해
다시금 채경에게 호되게 당한다.
그러자,
신군은
채경에게 말한다.
'우리가 이혼하면 정말 니가 원하는대로 전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서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믿니?
우린 일국의 황태자 부부였어,
그런 우리가 이혼하면, 그 피해가 단지 황실에게만 올 것 같니?
니가 그토록 걱정하고 사랑하는 너의 부모가 입을 불명예와 구설수는
너와 너의 부모 모두 전혀 생각지 않고 있나본데
어떻게 그렇게 순진할 수가 있지?
너의 부모는,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너를 황실로 들여보냈어.
그리곤 이제 그게 불편해지자 국민들 앞에서 대대적으로 한 혼인을
없었던 걸로 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게 가능해?
너같이 자격미달인 아이를 무턱 궁안에 들여보냈다가
사태가 불리해지자 혼인을 물리려고 든다면
앞으로 너의 부모가 얼굴을 들고 살 수 있다고 믿는거니?'
바로 이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신군이 하는 걸 보면
역시 작가가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황실과의 혼인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채경이나 그의 부모들이 모르고 있는 게
이상해서,
난 작가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신군의 입을 통해서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안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기껏 알려줬더니
채경은
너같이 이기적이고 답답한 인간들이 숨막힌 다는 둥,
말도 안되는 소릴 하고 자빠졌다는 둥
역시 신군을 몰아세울 뿐이다.
진지하게 신군이 한 말을 곱씹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저 말이 얼마나 무서운 현실인가에 잠시도 생각을 돌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군은 지금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고 믿는걸까?
휴...
하지만 신군도 답답하다.
아무리 표현력이 약해도 그렇지
아직도 채경이를 모른단 말인가?
어떻하지?
난 이제 니가 필요한데?
요 한 마디에 채경이는 당장 기대에 찬 얼굴이 된다.
아니
뭘 새삼스럽게 그토록 신군의 노골적인 애정 표현에 목말라한담?
그동안의 닭살 행각으로도 채경의 배는 아직도 고픈가보다.
아직도 배가 고픈 채경이도 채경이지만,
채경이는 주어와 목적어와 형용사와 부사 그리고 동사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문장을 만들어서
읽어주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신군도 문제가 있다.
중요한 말 앞뒤 모조리 자르고 생략하고 불필요하게 절제한 후에
기껏 한다는 말이
그가 하고자 하는 말 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핵심인
'내 곁에서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줄 황태자비가 필요해!'
이 대목만 말하니,
채경이가 알아듣겠냔 말이다.
그리곤,
정작 채경이가 듣고 싶어 안달이 난 말
'가지마..내 곁을 떠나지마..'
이렇게 짤막하고 간단한 말은
혼자 중얼대고 있다.
으이구;;;;
채경이가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궁이 답답하다고 난리를 치는 것도
다 거짓말이다.
그저 신군의 저 한 마디면
만사 땡이다.
그 한 마디를
신군은 그다지도 하기가 힘든가보다.
혼자 몰래 하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내가 보기에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은 궁합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은데 말이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