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궁

궁 20부- 황후의 꿈과 신군의 꿈

모놀로그 2011. 3. 13. 09:10

한국의 아들들은 참 불쌍하다.

그것은 평범한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일국의 황실에서조차,

아니 황실이기에 더더욱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여인들의 아들들은

그 어미의 인생의 업을 물려받아

그녀들의 꿈을 이뤄줘야 한다.

 

너만은..

내가 너 하나만 바라보고..

니가 내가 못다한 꿈을...

너라도 내 한을 풀어주길..

 

이런 말은,

우리나라 아들들이 엄마에게 흔히 듣는 말이다.

 

이상하게도 한국의 엄마들은

아들에게 저런 무리한 요구를 하고,

아들들은 어릴 때부터 세뇌를 당해

엄마라는 존재에게 최면이라도 걸린 듯

꼼짝도 못하며

이른바 마마보이라는 이름으로

길들여진다.

 

당연히 엄마들은

아들을 위해 못할 짓이 없고,

그런 엄마의 헌신을 먹고 자란 아들들에게

엄마는 가슴 아픈 존재이다.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

 

엄마...

 

궁의 두 여인인

황후나 혜정전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그들의 아들인

신군과 율군의 처지가

사가의 아들들과 뭐가 다르겠는가?

 

아니,

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

 

황후와 신군의 대화 장면은

짧지만 임팩트가 참 강하다.

그리고 서글프기까지 하다.

 

궁에서,

혜정전과 율군 모자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황후와 신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은 느낌이 참 달랐다.

 

 

혜정전과 율군 사이에 흐르는 끈끈함이

황후와 신군 사이엔 없다.

 

혜정전에 비해서

황후는 인간이나 여자,혹은 어머니라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런 황후가 황제의 연인이 황태후였음을 알게 된

신군의 시선에 의해서

우리에게 좀더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그동안은 신군의 시선에 비추인 황후가

우리에게 제시되었던 모양이다.

 

아들에게

 

'엄마'

 

내지는

 

'어머니'

 

소리조차 못하게 막았던 매몰찬 여자,

아들에게 살갑게 굴기는 커녕,

정치적인 대화 이외엔 전혀 나누지 않는

여자였던 황후는

여자이거나 엄마이거나 아니 아예,인간이길 포기한 듯

스스로를 박제화된 공식 기관으로 만들어버린 여인 같았다.

 

그러나

이제 신군과 마주앉은 황후는

신군의 시선에 의해서

그 껍질 속에 들어앉은

가련한 여자요, 아내이며,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 대화 장면이 슬픈 이유는,

 

한편에선

혜정전과 그의 아들이 날뛰고 있을 때,

 

일국의 황후이자, 황태자이면서도

웬지 궁의 중앙에서 점점 외곽지대로

다름 아닌 그들의 배우자에 의해서 밀려나고 있는 듯한

두 모자가 마주 앉아서

너무나 쓸쓸한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자 아버지인 황제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아들은 믿지 않는다.

 

황태자비이고 아내이며 사랑하는 여자인 채경은

황실에서 점점 멀어지며

따라서 신군도 이젠 그 황실의 일원으로만 대하려한다.

 

그런 배경을 뒤에 이고

마주 앉은 모자의 대화이기에

더욱 쓸쓸하다.

 

신군은,

황후가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 처럼 황후를 바라본다.

 

자기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고, 애정도 없으며

그저 황제나 되라고 닥달하던

무서운 여자가,

 

갑자기 따스하고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며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황후 아닌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삼 바라본 황후의 얼굴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궁에 얽매여 살아오면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나 그 운명에 자신의 생은 체념하였지만

그 댓가로 아들에게서 보상받고자 하는 집념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제 신군에겐 연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전형적인 한국 아들의 틀속으로 신군도 들어가려한다.

 

황후에게서 어머니를 느끼는 순간

신군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5살짜리 신군에겐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존재였을 것이다.

 

궁에 들어와서

갑자기 무서운 탈을 쓰고

자기를 조여대며

아들로 대해주지 않는 궁의 조직처럼 변해버린 엄마에 대한

갈구는 이미 오래 전에

어머니를 포기하게 만들었지만,

신군은 아직은 어린 청소년인 것이다.

 

황제에게 살갑게 대하라는 황후의 말에

신군은 잘라 말한다.

 

그런 가식적인 말과 행동은 할 수가 없다고!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요, 황제가

가식적인 인간의 모델케이스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가식적인 인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역시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에 강한 반발을 보인다.

 

그에겐 혜정전도, 율군도 모두 가식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특히나 율군이 그러하다.

그가 황제의 마음에 들만한 여러가지 아이템을 제공하고,

그때마다 황제의 칭찬을 들으며

과연 황제의 재목이라고 차츰 궁 안에서

혹은 종친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율군도 신군에겐 가식적인 인간이다.

왜나면, 그가 황제가 되려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채경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에겐,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내를 대상으로 꾸는 꿈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강한 자존심으론 용납할 수 없는 부도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그들과 같은 부류에 놓는 걸

거부한다.

 

하지만 황태자위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황후가 진작부터 알고 있으며,

그 이유에 채경이가 들어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군을 놀라게 한다.

 

바로 이때

난  다름 아닌 율군에게 대국민 생방에서의 이혼 선언을 종용받으며

흔들리는 채경의 얼굴을

슬프게 떠올린다.

 

채경이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혼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신군은 그 채경이를 궁에서 놓아주기 위해

황태자위를 버릴 생각을 하고 있으며,

그것조차 황후가 낱낱이 알고 있으니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아니,

황후의 겉보기와 다른

아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이

신군을 흔들리게 한다.

 

그는 이제 기꺼이 한국 어머니들의

아들에게 요구하는

자신의 실패한 인생의 보상을

들어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