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8부- 키친
난 신군이 채경의 처가에서 같이 보낸
며칠동안에 일어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도 물론 재미 있지만,
애초에 신군이 채경과 부부동반으로 처가를 방문하기로 결심한 것에
더 주목한다.
그건 신군으로봐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신군이 그동안 내내 냉소적인 무관심밖엔 보여준 게 없던
자신의 혼인을 스스로 인정하는 최초의 몸짓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자신이 평민 출신 황태자비의 남편이라고 대외적으로 선포하고 인정하는 의미도 있다.
그는 황태자이므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자연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된다.
당연히 친정나들이까지 뉴스에 나올 정도이고,
비좁은 채경의 집 근처는 중계차가 즐비하고, 기자진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신군은 채경과 나란히 서서 장인과 장모에게 인사를 한다.
그것이 뉴스가 되어 매스컴을 타고 전국으로 퍼지고,
티비며, 신문에 톱뉴스로 올라갈 때
신군과 채경이 부부라는 사실은 굉장히 견고해진다.
채경이 황태자비라는 사실도 이젠 의심할 여지 없이
국민들 뇌리에 박히게 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이 정략결혼을 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신군 말대로 정략 결혼이란 어휘는 이상하다.
대개 결혼으로 뭔가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정략 결혼이지만
자신보다 출신이 아래인 집안과 정략 결혼을 하는 법은 없으니.
어쨌든 두 사람이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라는 걸
전국민이 알고 있다고 해두자.
혼인한 이후,궁 안이나, 국가적 행사에 황태자부부가 멋진 옷차림으로
공식적으로 동반하여 참석하는 것과,
그렇게 일상적인 모습으로 어느 평범한 동네의 평범한 주택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그것이 전파를 탈 때 주는 느낌이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정략 결혼이던, 사랑 없는 억지 결혼이던 그 결혼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이제 두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부부라는 사실을
전국에 선포하는 게 된다.
아니, 궁에 있을 땐 채경이 신군의 비가 되지만,
그렇게 처가집 대문 밖에 나란히 서 있으면
채경의 남편인 신군이 되는 것이다.
즉 신군이 그렇게 채경의 집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채경은 이제 신군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매스컴 앞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당장 효린이 그 장면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안고
괴로움에 몸부림치지 않던가~!
하긴 나라도 내 남친이 그런 모습을 내게 보여준다면
돌아버릴 것이다.
차라리 혼인하는 광경을 보는게 낫지,
채경의 남편같은 얼굴로 채경의 집 앞에서
채경의 옆에 서 있는 신군을 보는 건
그야말로 물고문인 것이다.
그래서 친정나들이는 단순히 재미 있는 에피소드 이상의 의미를
내게 준다.
황태자가 궁이 아닌, 세상에 던져졌으니
당연히 재미 있는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 재미 있는 일들 속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들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신군의 처가방문은 우선
그들을 한 세트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아닐까 싶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채경의 친정은 동궁전이나 궁처럼 넓지를 않으니
신군 혼자 어디론가 숨어버릴 수도 없고,
신군도 말로는 처가집이지만 생판 남의 집에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자연 채경의 치마꼬리를 잡고 다닐 수밖에 없다.
궁과는 달리, 채경이는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린 이제까지완 좀 다른 신군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냥 다른 신군이 아니라, 채경과 한 세트를 이뤄가는
신군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 방에서, 그것도 같은 침대에서 잠자리를 하게 되는 것도
물론 재미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흥미롭게 바라본 장면은
어느날 주방에서 벌어진 일막이다.
그날, 집안은 조용했다.
모두들 알아서 사라져준 모양이다.
그때, 채경은 혼잣말로 이젠 신군에게
예사로울 수 없는 자신의 심정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런데도 난 채경이 대체 어떤 심정인지 감이 잘 안잡힌다.
채경은 신군과 한 침대를 쓰며 이성에 눈을 뜨게 되고,
그 이후로 신군을 대하는 심정이 달라진 모양이다.
그런데 어떻게 달라졌다는 것인지 애매하다.
채경은 늘 그런 식이다.
그녀는 신군을 보면 가슴이 뛰는건가?
신군과 나란히 있으면
좋다는 건가?
이제 신군이 남자로 보인다는 건가?
도무지가 뭐가 어쨌다는 건지 확실치가 않다.
반면에 여전히 그 표정에 그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읽는건지, 읽는 척 하는건지)
신군은 굳이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아도
"계란넣은 신라면" 이라는 한 마디에
난 그의 심리에 매우 가깝게 접근할 수가 있다.
참 묘한 일이지.
왜 내겐 채경이란 너무나 단순한 인물이
당췌 감이 잡히질 않는걸까?
그녀의 심리도 항상 종잡을 수가 없는걸까?
어떻든,
이후에 정말 중요한 장면을 볼 수가 있다.
즉, 태자비께서 손수 끓여주신
"계란넣은 신라면"을
태자 전하께서 허겁지겁 드시는 것도 모자라
품위없게시리 소리까지 내며 국물을 훌훌 드시는 동안
그 맞은 편엔 태자비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앉아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 놀러온 남친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그 앞에서 그것을 먹는 남친을 지켜보는 것 같다.
평범한 한국의 어느 주방에
평범한 옷차림을 한 고딩 둘이
라면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누가 그들을 일국의 황태자부부라 할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황태자부부이고,
이젠 그 공식적인 명칭에 앞서
정말 두 사람은 한 세트 같다.
신군 있는 곳에 채경 있고,
채경 있는 곳에 신군 있다.
채경 말마따나 한 세트같다.
그게 부부들의 특징 아닌가~!
늘 함께 붙어다니면서 한 세트를 이루는 것 말이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서로 대화다운 대화조차 해본 적 없는 그들인데,
그렇게 주방에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
정말 그들은 한 세트를 이뤄가는 것 같다.
이어지는 장면들도 재미있다.
황태자께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시는 것이다.
켁;;
정말 신군마자?
그런데 신군은 마누라가 라면을 끓여준 댓가로
최소한 설거지는 자신이 해야한다는
그 준열한 부부간의 법칙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걸까?
게다가 보이스카웃 출신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보이스카웃 출신이 아니라
어느 분식집에서 알바를 뛴 경험이 풍부해보인다.
아주 능숙하게 식탁에서 주섬주섬 빈그릇을 챙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니 말이다.
물론,
주방에서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시종 신군의 등짝에 꽂혀서 몽롱해있는
채경이다.
아니,
등짝으로 대변되는 신군이라는 아이, 혹은 황태자, 혹은 남편을
오로지 남자로 인식하는 채경이다.
그리고 한순간 뭐가 씌웠는지
그만 더이상 참지 못하고
등짝을 덮치고 만다.
이때 내가 정말 배꼽을 잡은 건,
신군에게 덮치는 채경이 아니라,
오히려 신군의 반응이다.
겁에 질린 듯,
채경을 뿌리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신군의 표정이 가관이다.
그렇게
신군과 채경은,
애마부인이 아니라
키친이라는 영화를 주방에서 찍고 있더란 말이다.
물론,
이 장면은 이후로
궁에 돌아온 신군과 채경의 의식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어떻게 그들의 관계가 달라지고,
그러나 또한 어떻게 제동이 걸리면서
본격적으로 복잡한 남녀사이로 변질되어 가는지
우리가 지켜본다면
아마 그 시발점이 되어주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린 며칠 간의 일탈이
신군에게 어떤 후유증을 주는 지 그걸 살펴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