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19부-명선당과 두이노의 悲歌
궁엔 반드시 핵심적인 장면이 있다고 일찌기 말한 적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19부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결국은 신군이 명선당을 스스로 찾고,
고서들이 들어찬 낡은 전각에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 시집 하나가
그의 눈길을 끌어서
그 시집으로 손을 뻗게 하며,
그리하여 그 안에서 마침내 선대의 악연과, 그 악연의 고리가
자기까지 끌어당기고, 어거지로 그 고리에
자기 운명까지 꿰려고 함을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하긴, 명선당을 신군이 찾기까지
이면에 깔린 것도
바로 그런 대를 이은 악연탓이니
얼마나 절묘한 운명의 장난인가~!
신군이 명선당을 찾은 이유가 뭘까.
결국은 그의 마음 속에도 여전히 불신이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채경이 더이상 신군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홀로 다락방에서 눈물짓고 있을 때
신군 또한 채경에 대한 불신이 잠재적으로 깔려 있기에
자기도 모르게 명선당으로 가는 것이다.
하기야,
신군이 보기엔 틈만 나면 노상 율군과 붙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떻든
명선당을 찾은 결과, 신군은 자신의 19년을 뒤흔들만한 충격을 받는다.
거기엔
부모에게 실망을 느끼는 청소년의 좌절감이 있을 것이다.
자기에게 늘 잔소리과 설교만 퍼부어대던 다름 아닌 아버지이자 황제가
실은 그토록 이중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
자식으로선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의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아내와 자식이 얼마나 불행해졌는지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다는 것도
신군으로선 기막힐 노릇이다.
게다가 상대는 누구인가!
한 나라의 황태자비였고, 지금은 황태후이다.
그녀는 자신의 명예를 짓밟아 황태자위에서 밀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걸 모르는 건
궁안에선 황제 폐하뿐이다.
바로 그 여자를 사랑했던, 혹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자신의 아버지인 것이다.
아버지의 자신에 대한 불신의 근원을 알았으니
신군으로선 미칠 노릇이다.
뿐이랴,
그 혜정전의 아들은
그 어머니의 아들답게, 일국의 황태자비를 내놓고 사모하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숨어서 했지만
21세기의 왕자는 형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의 남편에게도 숨기지 않는다는 정도이다.
아니 그래서 더욱 화가 치민다.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모든 상황,
황태자로서 명예를 실추당하고 있는 것,
사촌이 공공연히 자신의 아내인 태자비를 사랑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으로 인한
고통과 부부 사이의 불화의 근원이
모두 그 명선당의 서고에서 발견한
'두이노의 悲歌'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늘 장난꾸러기이다.
하필 그런 편지를 발견하고 돌아오는 태자가
그 편지의 주인공인 혜정전과 마주칠 건 뭐람?
가채머리 높이 이고,
오만한 표정으로 한껏 고개 치켜들고 있는 혜정전이
얼마나 신군에겐 가증스럽게 보였을까.
그리고 그렇게 그들이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
또한 신군에겐 얼마나 상처가 되느냔 말이다.
바로 눈 앞에 자신의 비극의 원천이 우뚝 서서
천역덕스럽게 말하고 있다.
'율이가 채경이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넌 남편이라면서
왜 방치하니? 제발 좀 그 푼수 계집이 율이 곁에 알짱거리지 못하게
좀 막아봐'
신군은 그런 혜정전을 똑바로 바라본다.
'당신 아들이 당신들이 했던 그 짓거리를 다시 하고 있다는 걸 알아?
제발 우리 부부가 당신 아들이자 나의 사촌인 율이를
가족으로, 친구로, 형제로 대할 수 있었으면 나도 정말 원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