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10부- 보관함
333이라는 숫자로 서고로 유인하여
단테의 신곡 안에 봉투를 넣은 것도 멋지지만,
그보다 더 재미 있는 건
보관함에 대한 잔상이다.
이 잔상은 여러차례 보여지는데,
사실 이 잔상만 잘 해석해도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쉽다.
누군가 보관함에서 붉은 봉투를 꺼낸다.
그 누군가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다.
그것은 뭘 의미하는가?
누군가가 그 붉은 봉투를 보관함 안에 넣어두면
또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간다는 것임은
굳이 생각해볼 것도 없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 보관함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아채고
잠복하고 있다가
영철을 발견하고 그에게 달려드는 오수는
그래서 조금 바보스럽다.
왜냐면
이번에도 배후 인물은 오수를 조롱하고 있다는 걸
오수는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굳이 보관함으로 유인한 이유와,
거기에 그가 기다리고 있던 영철이 나타난 이유까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번 영철이라는 떡밥을 던진 후에,
보기 좋게 소라를 이용해서 강펀치를 먹이고,
그러면서도 실은 그 상대가 영철이가 확실하다는 걸
의심할 수 없는 잔상을 이미 심었다.
해인의 입을 통해 그것을 확인해준다.
그 소년이 영철임을..
굳이 영철의 잔상을 심은 이유가 뭐겠는가~!
그러니 지금 전면에서 활약하는 인물은
영철이 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입증할 실체적 증거가 없다.
초조해진 오수는 그만 두번째 올가미에도 걸려든다.
그가 잠복하고 있을 걸 뻔히 알면서
영철은 보란듯이 그 보관함을 찾아오고,
대신 다른 보관함에서 원고를 꺼내는 것으로
공연히 보관함을 지켜보고 있는 수사진에게 삽질을 시킨다.
이미 침착성을 잃은 오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자기도 모르게 몸부림을 치는데,
사실 그도 알고 있으리라.
영철이 앞잡이이고, 그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보관함을 이용할 이유가 없으니까.
또한 일부러 그 보관함의 잔상을 자꾸 심어서
누군가가, (누군가는 영철이겠지만)
다른 인물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겐 유일한 실체적 증거인 영철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것밖엔
할 수가 없다.
영철 또한 오수가 그곳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 모조리 알고
보란듯이 그곳을 찾는다.
그가 오수에게 던지는 말을 보면
그 모든 연극의 의미를 알 수가 있다.
'보관함'이라는 제목의 연극의 결말은
영철의 처절한 저주의 대사이다.
그 대사를 허공에 대고 외치면 재미가 없다.
상대역이 필요하다.
즉 그것을 들어줄 인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말을 실제로 해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멋진 무대가 완성되겠는가~!
그래서
그 복잡한 연극의 막은
거리에서 자기에게 퍼부어지는 소름끼치는 말을 듣고
뒷걸음질치는 오수의 굳어버린 얼굴로 끝나는 것이다.
연출가인 승하와, 배우 영철은
흐뭇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거리에 버려진 듯 홀로 남은 건
관객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삐에로같은 배우가 되어서
홀로 무대 위에 버려진
오수의 두렵고 처절하며, 고독한 모습인 것이다.